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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시간은 곧 돈'인데…기다림은 낭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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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슈와이저 교수의 저서 'On Waiting' 완역본…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나를 길들여줘.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러나 만일 네가 무턱대고 아무 때나 찾아오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와의 대화 내용이다. 보고 싶은 누군가에 대한 기다림은 행복의 시간이다. 예를 들어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 연인은 만남 장소에 일찍 도착하더라도 상대를 만나게 될 그 시간까지 설렘의 기운을 유지한 채 기다림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시간은 곧 돈'인데…기다림은 낭비일까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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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아이유)이 지하철역 근처에서 언제 올지 모를 박동훈(이선균)을 기다리는 모습은 연인의 설렘과는 다른 감정이다. 힘겨운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40대 '성실한 무기징역수'와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 꿈도 사랑도 감정도 메말라버린 20대 비정규직 여성을 이어주는 교감의 끈은 기다림이다.


그렇다면 업무상의 이유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출퇴근 시간 버스정류장에서 눈이 빠져라 어떤 버스를 기다릴 때의 심경은 또 어떨까. 기다림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삶의 일부인 기다림의 의미에 천착해 시간과 삶, 인간 존재의 관계를 조명한 책이 나왔다.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인 정혜성씨는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라는 제목으로 해럴드 슈와이저 미국 버크넬대 영문학과 교수의 저서인 'On Waiting' 완역본을 펴냈다.


아이보리색 표지에 담긴 발레하는 여성의 모습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라는 책 제목만 놓고 보면 기다림의 미학을 전해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238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로 두껍지도 않은 분량이지만 쉽사리 진도를 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한두 번 읽어서는 슈와이저 교수가 전하려는 기다림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란 우리가 거쳐 가는 단순한 시간의 통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조건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슈와이저 교수가 책을 펴낸 이유다.


그는 '인스턴트 문화 시대'에 냉대의 대상이 돼버린 기다림에 주목했다. 실시간 결제와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 가능한 세상에서 "왜 기다려야 하지?"라는 물음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은 저자도 동의한다.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아니라면 삶에서 기다림은 대부분 지루한 낭비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슈와이저 교수는 대기실이나 기차역, 공항, 호텔 로비 등 잠시 머무는 장소에서의 기다림도 단순히 거쳐 가는 시간의 통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시간은 곧 돈'이라는 경제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진리와 통찰을 얻는 사색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슈와이저 교수는 기다림의 의미를 쪼개고 재결합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함의(含意)를 전하고자 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시간 철학'을 비중 있게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설탕물을 한 잔 만들려고 한다면) 설탕이 녹을 때까지 싫든 좋든 기다려야 한다." 설탕물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없는 '고유한 지속'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디세이아(Odyssey)'에 나오는 '페넬로페' 이야기도 슈와이저 교수가 전하려는 기다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페넬로페는 스파르타 이카리오스와 요정 페리보이아의 딸이자 영웅 오디세우스의 아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페넬로페가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를 탐하려는 이들의 구애가 이어졌다.


페넬로페는 남편을 기다린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재혼을 미룰 계책을 생각해냈다. 시아버지에게 줄 수의를 다 짠 뒤에야 재혼을 할 수 있다고 전했다. 페넬로페는 자신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도록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는 그것을 푸는 작업을 반복했다.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시간은 곧 돈'인데…기다림은 낭비일까



슈와이저 교수는 "밤을 틈타 수의를 다시 풀어내는 페넬로페는 자신의 기다림을 연장함으로써 남편과 시아버지의 삶을 연장할 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뒤엉켜 갈등하는 자아도 지켜낸다"고 설명했다.


예술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도 기다림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슈와이저 교수는 독일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아름다움의 현실성'이라는 글을 인용했다. "예술의 시간적 경험의 정수는 머무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이른바 영원이라는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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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와이저 교수는 시간의 철학을 다룬 것은 아니라고 서문에서 밝혔지만 'On Waiting'을 읽다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사유의 세계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슈와이저 교수의 원문을 한글로 옮긴 정씨가 "오래오래 책에 머무르면서 곱씹는 시간을 가져달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일까. 슈와이저 교수의 책 맺음말에 궁금증의 해답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에 끌려가기보다는 차라리 기다림의 경험을 스스로 요구할 때 우리는 시간의 상품화 경향에 맞설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고, 시간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된다."




류정민 건설부동산부 차장 jmryu@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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