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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가 흠모했고, 대중이 사랑했던 배우 최은희의 '영화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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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와 해방, 전쟁과 납북까지…파란만장한 인생역정 펼친 세기의 별이 지다

독재자가 흠모했고, 대중이 사랑했던 배우 최은희의 '영화 같은 삶' 충무로를 빛낸 은막의 스타이자 굴곡진 인생을 산 원로배우 최은희 씨가 별세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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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세기의 별이 졌다. 은막 너머로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아낸 원로배우 최은희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그녀가 주연한 영화 ‘상록수’를 보고 눈물을 훔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영화 중흥을 위해 그녀와 남편 신상옥 납치를 지시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내 독재자의 마음을 울린 여우(女優)의 삶은 한 세기를 돌고 돌아 고국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130편이 넘는 영화 출연,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극적인 피랍과 탈출, 망명에서 귀국까지…. 그녀가 걸어온 궤적의 큰 점만 살펴도 하나하나가 영화고, 예술이 됐다.

그녀를 스타로 만든 영화 ‘마음의 고향’에서 선보인 단정히 쪽 진 머리에 고운 한복 자태는 한국의 여인상이자 배우 최은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박제됐지만, 그녀는 과감하게 얼굴에 점을 찍고 짧은 미니스커트에 술병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바걸도 거침없이 소화해낸 천의 얼굴의 소유자였다.


해방 후 연극계에서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스크린 데뷔 후 열두 살 연상, 아이가 둘인 이혼남 촬영감독과 결혼하며 평범한 생활을 꿈꿨으나 남편의 의처증과 구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무대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진 순간, 돌연 관객석에서 뛰쳐나온 열성 팬과 마주했다.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팬은 다름 아닌 신상옥 감독이었다.


구원과도 같은 사랑을 시작한 그녀에게 첫 남편은 간통을 무기로 붙잡고 늘어졌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탓에 당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간통죄 피소 1호’ 소송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 사건 후 신상옥 감독은 최은희에게 “당신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찍을 영화들이 떠올라. 상상력의 원천이랄까”라는 말로 청혼했고, 부부이자 뮤즈와 예술가의 관계로 두 사람의 역사가 시작됐다.


독재자가 흠모했고, 대중이 사랑했던 배우 최은희의 '영화 같은 삶' 단아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된 최은희였지만,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양공주, 바걸과 같은 도박적 캐릭터도 거침없이 표현해내는 천의 얼굴의 소유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상록수’에 매료돼 이들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월급 직원만 200명에 달한 제작사 신필름은 영화의 왕국이었고,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냈지만 1972년 유신선포를 계기로 검열이 강화되자 부부의 창작 활동은 제약 끝에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 신상옥 감독의 외도를 계기로 구원의 사랑 역시 파국을 맞았다. 작품 활동을 줄이고 후학 양성을 위해 안양예술학교 후원자를 찾던 최은희는 1978년 1월 북한 공작원에 의해 홍콩에서 납치됐고, 그런 그녀를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전남편 신상옥 역시 동년 7월 북한에 피랍됐다.


고립된 폐쇄국가 북한의 김정일은 대단한 영화광으로 북한 영화 발전을 위해 남한의 톱스타와 감독을 연달아 납치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북한 영화를 국제무대에 내보내고 싶습니다” 또 다른 독재자의 전폭적 지원 하에 17편의 영화를 만든 부부는 예술적 자유 이면의 강압적 체제를 등지고 목숨을 건 탈출 끝에 미국으로 망명, 이후 1999년이 돼서야 비로소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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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2007년 펴낸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 헌병 대장에게 성폭행당한 일을 고백하며 “나를 욕보인 사람은 아군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누가 물어보지 않았고, 그저 소문만 무성했던 마음속 상처를 꺼내 보인 대담함은 식민지 조선과 해방공간, 전쟁과 납북, 망명 끝 귀국으로 켜켜이 쌓인 한 인간의 나이테를 세상에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연신 그녀를 렌즈에 담는 촬영자에게 “클로즈업은 말아주세요. 여배우도 인간인데, 그건 싫어요”라고 주문했다. 무대를 동경하던 소녀는 현대사의 질곡을 거쳐 원로가 된 마지막 순간에도 배우이고 싶었고, 배우였다. 세월은 망각을 낳고 추억만 남긴다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충무로는 한 명의 배우가 아닌 한 시절을 떠나보낸 셈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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