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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600년 전 유럽 불륜·욕망을 간지럽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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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의 아버지' 제프리초서作, 캔터베리 이야기…'타락의 시대' 오늘의 의미, 기득권 구조와 거대한 유리벽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캔터베리의 순례자들은 곳곳에 팬 구덩이를 피해야 했고, 시내와 강을 여러 번 건너야 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거지, 사기꾼과 싸워야 했다. 걸어서 순례하는 사람은 가짜 수도사나 창녀, 구경꾼 시선을 이겨내야만 했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국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토머스 베켓 대주교의 순례 행렬에 대한 얘기다. 영국 템스강 남쪽에 있는 서더크 '타바드 여관'에 모인 순례자들이 주인공이다. 사회자인 여관 주인을 비롯해 기사, 방앗간 주인, 변호사, 탁발 수사, 상인, 소지주, 면죄사, 수녀원장, 본당신부 등 다양한 인물이 동참한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655페이지에 이르는 번역본 중 종교적인 교훈을 전하는 '본당신부 이야기'는 8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600년 전 유럽 불륜·욕망을 간지럽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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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책은 차고 넘친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단지 '순례자의 삶'에 천착한 내용이라면 중세 유럽 문학의 새 시대를 연 작품이라는 평가는 과분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문학에 영향을 받아 세계적인 문호(文豪)로 성장했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캔터베리 이야기는 600년 전 유럽의 불륜과 외설, 욕망의 '실상'을 파헤친다.


세속의 이익에 빠진 주류사회, 엄숙주의로 포장한 권력의 민낯을 통렬하게 꾸짖는 내용이 책에 담겼다. 그렇다고 권력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는 전사의 모습을 상상해서는 곤란하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주축은 중세 유럽의 B급 문화다.


"우리 남편이 아내인 내게 진 빚을 갚고자 한다면 나는 밤이나 낮이나 나의 '그것'을 갖게 해줄 거예요. 난 채무자이자 나의 노예가 될 수 있는 남편을 원해요."


'베스의 여인의 이야기'는 점잖은 공간에서 읽기에는 민망한 내용이 가득하다. 남편의 지갑과 금고를 모두 빼앗았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지갑은 '고환', 금고는 '정액'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게 평론가들의 분석이다. 이처럼 언어의 유희가 캔터베리 이야기의 주된 특징이다.


송병선 한국외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는 "초서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여러 종류의 아이러니가 있지만 언어의 아이러니가 가장 중요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내용은 하나둘이 아니다.


'상인의 이야기'에는 눈이 멀어버린 남편의 처지를 이용해 젊고 매력적인 다른 남성과 '위험한 불장난'에 나선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여성에게 돌을 던져야 할까. 남편은 나이 환갑이 넘어 젊은 아내를 맞이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성적(性的) 도구였다.


남편의 얘기를 듣고 나면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지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신부는 스무 살이 넘으면 안 되네.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네. 생선은 다 자란 것이 좋지만, 고기는 어린 것이 더 맛있지. … 늙은 과부들은 얕은 물에 띄워놓은 배처럼 결혼 생활의 속임수를 낱낱이 알고 있어서." 남편과 아내, 누가 진짜 속물인가.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600년 전 유럽 불륜·욕망을 간지럽히다



이처럼 캔터베리 이야기는 인간 세계의 '욕망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성별이나 직업, 신분과 관계없이 이런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교단으로부터 특권을 받은 '탁발 수사'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권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려다 망신을 당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교단의 그늘을 폭로하면서도 이야기 전개가 무겁지는 않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담긴 에피소드 상당수는 통통 튀는 리듬감, 해학과 유머가 어우러져 있다. 요즘으로 보면 불륜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과 같은 내용인데 가벼운 터치로 접근한 탓인지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한다.


60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영문학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캔터베리 이야기는 종교의 우산 속에 감춰진 그늘을 향해 돋보기를 들이댔다. 종교 자체를 대상화하려는 게 아니라 종교로 상징되는 중세의 '권위'에 대한 유쾌한 도전이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갈등 구조, 다양한 직업군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통해 인간과 삶의 의미에 대해 되묻는다. 600년 전 계급 시대의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 구조는 현시대의 다양한 삶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욕망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연결돼 있다. 성(性)과 재물에 대한 집착, 권력을 활용한 부당이익 실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망을 향해 돌진하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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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타락의 시대'는 지금 더 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세의 계급 제도가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억제하는 사슬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의미의 계급 제도가 우리 사회를 옭아매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기득권 구조의 '카르텔'은 공고하게 유지된다. 우리는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벽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가 점점 고갈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세상에 적응하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캔터베리 이야기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건설부동산부 차장 jmryu@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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