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목욕탕'·'종이달'·'토니 타키타니' 배우 미야자와 리에
'국민 여동생' 1990년대 초반 누드사진집 파문...파혼·자살시도 등 스캔들메이커
삶의 고난·피로 묻은 얼굴로 다시 맞은 영화세계…조금씩 일상의 여인으로..
오랜 세월 버틴 육체로 인생의 맛과 깊이 표현 "모든 관객과 공감하고파"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미야자와 리에(44)가 국내에서 회자된 시기는 1991년이다. 일본에서 155만 부 발행된 누드사진집 '산타페'가 암암리에 전파됐다. 하얀 얼굴과 늘씬한 체형. 겨우 열여덟 살이었기에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일본 여론은 촬영을 수락한 그녀의 어머니를 강하게 지탄했다. 미야자와는 당시 '국민 여동생'으로 통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TV 광고에 출연해 인지도를 쌓았다. 이후 노래와 연기로 활동 영역을 넓혀 1990년대 초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독특한 성장 배경도 여기에 한 몫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네덜란드인이다. 미야자와가 태어나자마자 고국으로 떠나버렸다. 미야자와는 어머니의 새로운 남자들과 함께 지내거나 친척 집에 맡겨졌다. 연예계는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연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텅 빈 마음을 채웠을 것이다.
대개 이런 스타들은 자주 염문에 시달린다. 마릴린 먼로나 나카모리 아키나(52)처럼 애정결핍 증세도 보인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 사회는 미야자와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는 인기 스모선수였던 다카노 하나(45)와 파혼하고 거식증에 걸려 체중이 30㎏대까지 줄었다. 축구선수 나카타 히데토시(40) 등과의 열애로 '스캔들 메이커'라는 오명을 쓰고 자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소문만 무성할 뿐, 대표작 하나 없는 배우였다. 하지만 비극의 막다른 골목에서 미야자와는 회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쌓은 노하우와 자기 삶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로 독창적인 세계를 열었다. 그 표정은 대부분 인생의 덧없음을 가리킨다.
배우는 배역에 자신이 걸어온 삶을 투영하고 이를 통해 공감을 구한다. 미야자와는 평범한 인물을 연기할 수 없는 얼굴이다. 속세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오며 겪은 고난과 피로가 곳곳에 묻어있다. 일본의 감독들은 이 얼굴에 주목했다.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난 작품은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소설의 2차원적 문법을 섬세하게 옮겨놓았다. 대다수 감독들은 소설과 영화 사이 표현 수단의 차이를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이야기만 가져온다. 이치카와 감독은 이 간극을 다양하게 좁힌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을 그리는 배우가 장면의 끝에서 전지적 내레이션의 문장을 대신 읊는다. 소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文彩)로 대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이야기의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세계에서 미야자와는 배역이 되고, 누구도 아닌 3자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쇼핑에 중독된 토니 타키타니의 아내 에이코와 토니에게 고용돼 에이코의 옷을 입는 히사코를 연기한다. 대사보다 현실과 거리가 있는 표정으로 에이코와 히사코의 공허함을 말한다. 백미는 히사코가 에이코의 하얀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며 갑자기 눈물을 쏟는 롱테이크 신이다.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운다.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잠시 뒤 토니가 모습을 보러 와서." 미야자와는 흐느끼며 끝나지 않은 문장을 완성한다. "'어째서 울고 있는 것인지' 그녀에게 물었다." 문을 열고 놀란 토니에게 히사코는 연신 "죄송하다"고 한다. 미야자와는 이 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가 왜 우는지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았어요. 이치카와 감독도 말해주지 않았고요.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배우에게 다소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무런 장애도 없다'고 되뇌었어요. 내 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거죠. 촬영을 마치고 이치카와 감독이 어깨를 두들기며 '잘했다'고 하더군요. 많이 어려웠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로서 뭔가 단단해진 게 아닐까 싶어요."
그녀만의 독창적인 연기세계는 7년 만에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54)의 '종이달(2015년)'에서도 나타난다. 미야자와는 지루한 일상을 보내다가 파트타임으로 은행에서 일하는 우메자와 리카를 연기한다. 친절한 말투로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불륜에 빠지면서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대는 배역이다. 미야자와는 때로는 겁먹은 순종적인 아내를, 때로는 욕망을 분출하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보여준다. 돈다발을 만지면서 변해가는 우메자와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결말이 뻔히 드러난 이야기에 긴장과 설득력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 모든 연기는 그녀가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다.
"우메자와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여성이지만, 나는 그런 삶을 겪은 적이 없어요. 주위에서 그녀가 변해가는 과정에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거의 모든 과정을 연구해야 했지요. 이 학습을 통해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일본의 영화팬들은 종이달 속 미야자와의 얼굴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자각했다. 나이에 상응하는 주름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중년에 접어든 많은 여자 배우들은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 노화를 숨긴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육체가 가진 존재감을 스스로 부정한다. 이 때문에 어떤 연기를 해도 배우의 삶과 그 방식이 스며든 모습을 엿볼 수 없다. 미야자와는 그들과 달리 자신의 나이테를 숨기지 않는다. 늙어가는 얼굴이 주는 맛과 깊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스크린 밖에서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신파나 다름없는 니카노 료타 감독(44)의 '행복 목욕탕'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건 미야자와의 이런 의지 때문일 것이다. 미야자와는 목욕탕을 운영하면서 자식을 강하게 키우는 어머니 후타바를 연기한다. 담담하게 시한부인생을 고백하다가 잔소리로 남편을 타박하는가 하면,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딸의 상처를 보듬는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아무도 없는 입원실 창가에 주저앉아 조용히 흐느낀다. "더 살고 싶어. 죽기 싫어." 이 혼잣말은 신파여서라기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조차 마음 놓고 울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슬프게 전해진다. 미야자와는 그렇게 조금씩 평범한 우리 인생에 다가오고 있다.
"어머니를 연기할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많은 것들을 얻어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죠. 그대로 표현하진 않아요. 우는 연기를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너무 우는 거 아니야'라고 묻죠. 그런 과정이 배우로서 나를 성장하게 하는 것 같아요. 20년, 3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작품으로 이어지고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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