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배우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믿기지 않는다. 영화계에 입문한지 어느덧 21년. 출발은 송능한 감독(58)의 '넘버3(1997년)'다. 엑스트라나 다름없는 태주(한석규)의 부하. 그래도 대사가 있었다. 극 후반 재철(박상면)과 함께 등장하는 룸살롱 신에서다. "나는 말이야. 체질적으로 쪽바리 새끼들이 싫어. X새끼들, 남의 땅을 자기들 땅으로 우기질 않나 말이야." 리허설을 거쳐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스크린에 내 얼굴이 2초가량 나왔다. 내 생애 가장 긴장되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나는 맨땅에 헤딩하듯 연기를 시작했다. 뒤늦게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다. 배우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에 밑거름을 다지고 싶었지만,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척 엄하셨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길 바라셨다. 나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펼친 책에서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중간고사를 준비하다가 문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해 배우가 됐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박태수(최민수) 같은 터프한 배역을 그리고 싶었다. 패션모델로 활동하던 친형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왜 형에게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냐고? 성적이 별로여서 일찍이 포기하셨다. 형은 모델에 재능이 있었다. 나보다 체격도 크지만 몸이 아주 탄탄하다. 프로필 사진을 촬영할 때 나는 매니저를 자처했다. 서울 강남구의 도산공원까지 졸랑졸랑 따라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줬다. 사진을 찍던 작가가 형에게 물었다. "저 친구는 누구예요?" "친동생이요." "기념으로 같이 한 번 찍으시죠." 얼떨결에 카메라 앞에 섰는데,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플래시가 터졌다. '이런 촌놈.' 그 찰나의 아쉬움 때문일까. 돌아오는 길에서 나를 비추던 카메라가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다시 그 앞에 선다면 훨씬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1997년의 첫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몰래 대학로를 전전했고, 3년 뒤에야 사실을 토로했다. 처음 주인공을 맡은 연극의 무대를 보여드렸다. 대학로에서도 가장 구석진 골목에서 하는 작은 공연이었지만, 아버지는 진심을 알아주셨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 더 열심히 정진했다. 연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고 최배달이 '도장 깨기' 하듯 오디션에 임했다. 긴 무명생활을 겪으며 후회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연기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다. 설사 힘든 일이 닥쳐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떤 배움의 과정도 없이 막무가내로 뛰어들었으니 이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무모한 자세가 진일보를 내딛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격언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어떤 일이든 성공하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라.' 나는 넘버3에 출연하면서 일당으로 3만5000원을 받았다. 주위에서 우려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있는 곳이 밑바닥이니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계단씩 오르며 캄캄했던 터널 속에서 빛을 발견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희망이었다.
# 박성웅은 영화배우 겸 탤런트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영화 '넘버 3'로 데뷔한 뒤 남성적인 역을 주로 맡았다. 특히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신세계'에서 이중구 역으로 출연해 "살려는 드릴게",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와 같이 강렬한 대사로 명장면을 남겼다.
정리=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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