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저택 살인사건' 배우 김주혁이 묻습니다
표현 서툰 연애 초보 광식이 내 모습…로맨틱코미디서 악역으로 연기 변신
'비밀은 없다' 김종찬 '공조' 차기성 이어 '석조저택 살인사건' 파렴치한 남도진
장르적 변화 시도…타당성의 고민 "절제된 연기 당위성 갈수록 중요"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나 신입생 때 오빠는 만날 밥 먹는 여자애들이 바뀌었는데." '너랑 먹기 위해서였다.' "영화 보는 여자애들도 만날 바뀌고." '너랑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에서 대학생 광식(김주혁)은 연애에 서툴다. 신입생 윤경(이요원)을 좋아하지만 고백하지 못한다. 7년이 지나 재회해도 상황은 변함이 없다. 윤경이 그의 이름과 학번을 또렷이 기억하자 어쩔 줄을 모른다. 마음을 다잡고 고백할 기회를 잡지만 긴장한 나머지 딴소리를 하고 만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빠두요."
김주혁(45)은 광식과 많이 닮았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표현에 서툴러요. 진지한 상황에서 속내를 말하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막 던지고 말죠. 그래서 배우가 된 것 같아요.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며 쾌감을 느끼죠. 당연히 연기할 수 없을 때가 가장 힘들고 괴로워요." 그는 주로 로맨틱코미디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부드러운 말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연기는 과장되게 나타나지 않는다. 무표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배역의 감정을 뚜렷하게 표현하기보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을 더 중시한다. "이른바 수비형 배우에요. 어떤 배우가 오든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흘러가는 리듬에 맞춰 연기하죠. 그렇게 배역에 몰두하다 보면 표현도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만, 가진 기량 이상의 연기가 나올 때가 있어요. 훌륭한 배우와 호흡을 맞출 때가 특히 그렇죠."
최근 연기는 다소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장르적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연달아 악역을 맡았다. '비밀은 없다(2016년)'에서 딸이 실종됐는데도 국회의원 선거에 집중하는 정치인 김종찬과 '공조(2016년)'에서 위조지폐 동판을 탈취하고 남한으로 숨어든 북한군 차기성이 그렇다. 모두 욕망을 채우고자 혈안이 돼 있다. 김주혁은 이들을 악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악행이라도 분명한 타당성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악역이니까 악하게 표현해야지'라고 다짐하면서 하는 연기는 매력적이지 않아요. 어떤 행동이든 타당하다고 여기고 표현해야 제대로 맛을 살릴 수 있죠. 미친 사람이 스스로 미쳐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는 지난 9일 개봉한 정식ㆍ김휘 감독의 '석조저택 살인사건'에서도 악역을 그렸다. 운전수 최승만(고수)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경성 최고의 재력가 남도진. 유죄를 입증하려는 송태석 검사(박성웅) 앞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파렴치한이다. 영어, 일본어, 독일어에 능통하고 능숙한 피아노 솜씨로 주위를 매료시키지만, 차기성이나 김종찬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은 무표정과 절제된 행동에서 단번에 전해진다. 하지만 김주혁은 "이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고백했다. "스릴러를 처음 해서 그런지 긴장했어요. 관객이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너무 많이 표현했죠. 특히 법정 신이 그래요. 뻔뻔한 얼굴로 일관하다가 소리를 지르는 신에서 너무 뚜렷하게 인물을 그려버렸어요.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작품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어요."
악역을 맡은 배우에게 보다 악하게 보이기를 요구하는 감독도 있다. 주인공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지독하고 암울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김주혁은 "설득되지 않으면 그런 연기를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영화는 배우의 연기로만 채워지는 매체가 아니에요. 촬영, 조명, 음악 등을 통해서도 감독이 얼마든지 의도를 담을 수 있죠.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선 굵은 연기를 하겠지만, 기승전결 구조에 의거해 감정을 증폭하거나 행동을 과하게 하는 것이라면 사양할래요."
김주혁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기는 '모스트 원티드 맨(2014년)'에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그리는 군터 바흐만과 '로스트 인 더스트(2016년)'에서 제프 브리지스(68)가 연기하는 마커스 해밀턴이다. 배우들이 영화의 전개에 관계없이 배역의 행위를 타당하게 보여주는데 전념한다.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일상에 가까운 연기로 작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김주혁은 "최근 할리우드에서 이런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과한 연기는 장르를 불문하고 독이 될 수밖에 없어요. 배우의 연기에도 그렇겠지만, 작품에도 문제가 돼요. 감독은 작품 전체를 보지만, 배우는 한 배역만 끊임없이 파고들어요. 그들보다 배역을 잘 아는 이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김주혁은 남도진이 되기 위해 카메라 불이 켜질 때마다 사이코패스가 됐다. 감정을 절제하고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겼다. 촬영 전에는 전자피아노를 집에 들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열심히 연주했다. "피아노 연주 신이 많이 편집돼서 아쉽지만, 남도진이 좋은 첫 인상을 만들 줄 아는 인물이라는 정보는 충분히 전달한 것 같아요. 사이코패스가 대개 매력적이라고 하잖아요. 구두를 깨끗이 닦는 장면도 그래서 제안했죠. 촬영할 때는 '죄의식을 갖지 말자'고 몇 번씩 되뇌었고요."
사이코패스의 면모를 표현하는 데는 매끈한 몸매도 한 몫 한다. 선명한 복극과 탄탄한 팔 근육, 넓은 어깨로 멋들어진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세련된 도시 느낌을 뿜어낸다.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TV 예능프로그램 '1박2일' 때문이다. "프로듀서가 벌칙을 지시하면서 옷을 많이 벗기더라고요. TV로 그 모습을 보는데 몰골이 충격적이었어요. 바로 트레이닝센터로 달려갔죠. 처음에는 역기를 드는 게 너무 싫었는데, 계속 하다보니까 중독이 됐어요." 탄탄한 몸은 그의 연기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손에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색깔부터 달라졌다. "1년 전만 해도 90% 이상이 로맨틱코미디였는데, 공조에서 웃통을 벗은 뒤로 장르가 다양해졌어요. 입맛대로 골라서 출연할 수 있을 정도죠. 앞으로 다양한 모습을 기대하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