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상·남녀조연상 모두 흑인 배우 품으로…'反트럼프' 발언·패션에 배우들 큰 박수와 호응
[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 아카데미 시상식이 편견을 깨고 새로운 역사를 썼다. 흑인감독이 연출한 영화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받은데 이어 남녀조연상 모두 흑인배우가 차지했다. 사상 첫 무슬림 배우 수상 기록까지 더하며 아카데미는 '백인들의 잔치'라는 오명을 씻어냈다.
2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89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배리 젱킨스 감독의 '문라이트'가 영예의 작품상을 받았다.
'문라이트'는 마이애미 빈민가에 사는 흑인 소년 샤이론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흑인 감독의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2014년 스티브 맥퀸 감독의 '노예 12년'에 이어 두 번째다. 흑인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다양성과 인종 차별을 지적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영화로 남우조연상을 차지한 흑인 배우 마허셜라 알리는 아카데미 역사상 첫 무슬림 배우 수상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알리는 '문라이트'에서 마약상이면서도 내면은 따뜻해 주인공 샤이론의 길잡이가 돼주는 후안 역을 연기했다. 흑인 남자배우가 아카데미 수상자로 호명된 것은 10년만이다.
올해 여우조연상 역시 '펜스'에 출연한 흑인배우 비올라 데이비스가 거머쥐면서, 아카데미 최초로 남녀조연상 모두 흑인이 수상했다. '펜스'는 1950년대 미국 피츠버그를 배경으로 잘 나가던 야구선수 트로이 맥슨이 청소부로 일하면서 백인사회의 벽에 좌절하고 흑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야기다. 비올라 데이비스는 2009년 '다우트'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2012년 '헬프'로 여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후 삼수 끝에 오스카 트로피를 받게 됐다.
여우주연상은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에서 배우 지망생 미아역을 맡은 엠마 스톤이 차지했고, 남우주연상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온 리 역을 맡아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삭이며 살아가는 인물을 그려낸 케이시 애플렉에게 돌아갔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예상대로 '정치적'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을 맡은 코미디언 지미 키멀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풍자를 쏟아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께 감사드린다. 작년에 오스카상이 인종차별적으로 보였던 것 기억하느냐? 그게 올해는 사라졌다"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지난해 아카데미는 '유색인종 차별' 논란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올해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 덕분(?)에 인종과 차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컸던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분위기는 아카데미 수상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키멀은 골든글로브 시상식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메릴 스트리프를 공격한 일도 상기시켰다. 메릴 스트리프는 지난달 골드글로브 평생공로상 수상 소감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후 트럼프는 그를 향해 "과대평가된 배우"라는 트윗을 남겼다.
이에 대해 키멀은 "한 여배우는 과대평가된 연기로 오랜 세월 건재하다. 그녀는 올해까지 20차례나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됐다. 우리는 올해도 습관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고 말해 큰 호응을 끌어냈다. 메릴 스트리프가 이날 시상식장에 입장하자 동료 배우들은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이날 레드카펫에 선 배우들의 드레스에서도 '반트럼프' 목소리가 반영됐다. '러빙'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루스 네가를 비롯한 여러 배우들은 의상에 파란 리본을 붙이고 나왔다. 이 파란 리본은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해 법정 투쟁을 불사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지지하는 상징이다.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