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파탄’을 ‘여성 리더십의 파탄’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잖다. 앞으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크게 꺾일 것이라는 얘기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의 파탄을 ‘여성’의 실패라고 볼 수는 없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와 최순실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이 막장극에 많은 여성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 여인 게이트’와 같은 식으로 부르는 것은 절대로 온당치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간 보였던 행태, 대등한 관계와 열려 있는 대화를 거부하는 일방성과 억압성에서 그들은 여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反)여성이었다.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부인하고,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건 남성 이상으로 남성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박근혜라는 여인에 대해 그의 비(非)여성, 반(反)여성을 얘기하는 것은 그가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다는 것 따위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성' '여성적인 것'이지 생물학적인 여성 자체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박근혜 재앙’으로부터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진짜 여성적인 것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쳐야 한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남성 중심으로 이뤄져 온 가운데서도 특히 ‘남성성’이 강력히 지배해온 한국의 역사, 그 발전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열쇠로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의식적으로든 미래의 열쇠는 여성이 쥐고 있다는 말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여성이 숫적으로 많이 사회적 진출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여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의 힘이 남성 중심의 세계, 경쟁과 정복과 억압으로 점철된 남성주의의 세계발전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로 가는 길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재작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역사에서 지워지고 존재를 부정당하고 아파도 아프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아온 참전 여성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았다. 그 책에 서술된 여성은 무엇보다 먼저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여성, 약자의 모습이었지만 그 책이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전쟁과 폭력의 극복이 여성을 통해서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평화와 화해와 공존과 호혜의 새로운 미래를 여성들이 열어줄 것임을, 그래야 함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여성성의 고양, 그것은 남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의 야만을 문명화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남성을 온전한 ‘남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가 대화를 대화답게 하기 위한 비결의 하나는 여성을 대화에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듯 여성으로써 남성을 다스리고, 그럼으로써 남성은 진짜 남성에로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200년 전 괴테의 ‘파우스트’가 ‘이 세계를 가장 내밀한 곳에서 통괄하는 힘’을 찾았던 파우스트가 숱한 모험과 시련을 겪은 뒤 마지막에서 ‘여성적인 것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깨침을 얻는 것에서도 예고된 것이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옆을 지켰던 이는 여인들이었다. 그는 여인들의 오열 속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활의 소식은 여인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것은 인류의 소생과 구원과 부활은 여인에 의해, 어머니이며 생명인 여인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방적이지 않고 상대방을 긍정하며, 나누고 협력하며 자애로 생명을 키워주는 소명을 본능으로 안고 태어나는 여성들. 그 여성성은 선언적으로뿐만 아니라 현실의 과제에서도 요청되는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지금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얘기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조건인 창의와 활력의 한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기술과 산업발전의 결과를 0.1%가 독식하는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을 벗어나 경쟁을 보완하는 협력의 플랫폼(다른백년연구원 이래경 이사장)’을 배태하고 키워주는 자궁이 우리에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박근혜의 파탄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여성이다. 아니, 박근혜의 파탄으로 이제 더욱 더 여성이다. 우리에겐 ‘진짜 여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