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이어 한국서도 1조원대 과징금
[아시아경제 오종탁 기자] 미국의 통신칩 제조업체 퀄컴의 특허권 남용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상 최대인 과징금 1조300억원을 부과했다. 퀄컴은 중국에 이어 한국에서도 1조원대 과징금 폭탄을 맞으며 극심한 수익·기업 신뢰도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공정위는 28일 "지난 21일 전원회의에서 글로벌 통신칩셋 및 특허 라이선스 사업자인 퀄컴 인코포레이티드와 2개 계열사(이들 3사를 통칭해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해 시정 명령하고 과징금 1조300억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퀄컴은 이동통신 표준기술인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광대역코드분할다중접속(W-CDMA), 롱텀에볼루션(LTE) 등과 관련해 국제 표준화기구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유럽통신표준연구소(ETSI)에 프랜드(FRAND) 확약을 선언한 표준필수특허(SEP) 보유 사업자다. FRAND 확약이란 SEP의 사용권을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인 방식으로 누구에게나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동시에 퀄컴은 모뎀칩셋을 제조·판매하는 수직통합 독과점 사업자다.
공정위는 퀄컴이 FRAND 확약을 어기고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퀄컴은 경쟁 모뎀칩셋사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칩셋 제조·판매에 필수적인 이동통신 SEP에 대해 라이선스 제공을 거절하거나 제한했다. 경쟁사에 라이선스를 제공하면 휴대폰사에게 특허료를 받는 수익 모델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삼성·인텔·비아 등이 퀄컴에 라이선스 계약 체결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미디어텍의 경우 '완전한'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원했는데, 퀄컴 측 의중에 따라 라이선스 대상 권리를 제한하는 '불완전' 계약을 맺는 데 만족해야 했다. 퀄컴은 미디어텍의 판매처를 제한하고 모뎀칩셋의 사용 권리를 제한하는가 하면 제품 모델, 모델별 판매량, 고객명 등 민감한 영업 정보까지 자사에 보고토록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퀄컴은 칩셋 공급과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연계, 칩셋 공급을 볼모로 부당한 라이선스 계약 체결·이행을 강제했다. 자사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지 않은 휴대폰사에는 모뎀칩셋을 공급하지 않는 사업 정책을 수립하고 엄격히 실행했다. 이런 정책을 모뎀칩셋 공급 계약에도 반영, 휴대폰사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이행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칩셋 공급을 거절·중단할 수 있게 해놨다. 실제로 휴대폰사와의 라이선스 협상 과정에서 모뎀칩셋 공급 중단 위협을 카드로 활용했다.
'갑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퀄컴은 휴대폰사에 포괄적 라이선스 만을 제공했다. 퀄컴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회사들은 칩셋에 구현되는 이동통신 SEP와 기타 특허, 또는 2G·3G·4G 등 이동통신 표준별 SEP 구분 없이 퀄컴 특허 전체를 한꺼번에 사용해야 했다. 그러면서 퀄컴은 정당한 대가 산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한 라이선스 조건을 강요했다. 휴대폰사가 퀄컴의 특허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기회는 없었다. 이 밖에 휴대폰사 200여곳은 자사가 보유한 특허를 정당한 대가도 받지 않고 퀄컴에 교차 라이선스 해줬다. 물론 퀄컴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3가지 불공정 행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체적으로 퀄컴의 경쟁제한적 사업 모델을 완성했다. 일단 경쟁 칩셋사에 대해 라이선스 제공을 거절·제한함으로써 경쟁사에 불리한 경쟁 여건을 조성, 칩셋 시장은 손쉽게 퀄컴 독점 체제가 됐다. 퀄컴은 칩셋 시장의 지배력을 이용해 휴대폰사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이행하지 않으면 칩셋 공급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FRAND 제약을 회피하고 라이선스 시장에서 협상력을 높였다. 이렇게 배가된 힘을 통해 휴대폰사에 일방적인 라이선스 조건을 강요하고 특허도 무상으로 제공토록 요구한 뒤 이를 다시 특허 우산으로 활용했다. 자사 칩셋을 경쟁사 칩셋보다 유리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칩셋 및 특허 라이선스 시장에서 자사 독점력을 유지·강화하는 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퀄컴의 시장지배력 남용이 야기한 폐해는 심각했다. 모뎀칩셋과 이동통신 SEP 라이선스 시장에서 발생한 경쟁 제한 효과는 다른 사업자의 연구개발(R&D) 활동을 가로막았다. 이동통신 기술 R&D 경쟁은 저해됐다.
그 결과 공정위 사상 최대인 1조300억원 과징금 조치가 내려졌다. 공정위는 지난 7월 첫 전원회의를 개최한 이후 경제학, 법학, 특허 등 주요 쟁점 분야별로 5차례, 퀄컴의 동의의결 신청 건의 심리 2차례 등 총 7차례 구두심의를 거쳤다. 공정위는 "전통적인 경쟁법과 경제학의 시장지배력 남용 법리 분석 외에 특허법의 주요 쟁점 및 통신기술 분석, 국제예양 등 고도의 전문적·기술적 이슈에 대한 검토와 판단이 요구됐다"며 "퀄컴의 방어권 등 공정한 절차 보장과 함께 이동통신 산업에서 세계 각국의 이해 관계자들이 심의에 참여하는 등 충분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 5개월여의 심의 기간을 썼다"고 전했다.
공정위는 과징금 처분과 함께 퀄컴에 ▲앞으로 모뎀칩셋사가 요청하면 특허 라이선스 계약 협상에 성실히 임할 것 ▲모뎀칩셋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경우 판매처 제한, 칩셋 사용 권리 제한 등 부당한 제약 조건을 요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모뎀칩셋 공급을 볼모로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강요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관련 계약조항은 수정·삭제토록 했다. 휴대폰사와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할 때 부당한 계약 조건을 강조하지 말고 휴대폰사의 요청이 있으면 기존 특허 라이선스 계약 재협상에 나서도록 명령했다.
또 시정 명령을 받은 사실을 휴대폰사·칩셋사에 통지하고 신규 계약 또는 계약 수정·삭제 시 그 내용을 공정위에 보고하게 했다.
이번 공정위 조치로 미디어텍, 인텔 등 경쟁 모뎀칩셋사는 칩셋 제조, 판매, 사용 등을 위한 정당한 특허 사용 권리를 취득하게 됐다. 기술력과 가격, 품질 등에 기반해 퀄컴과 대등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휴대폰사도 퀄컴 칩셋 공급에 대한 염려 없이 퀄컴과 같은 위치에서 FRAND 라이선스 조건을 협상할 수 있는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것으로 공정위는 기대했다.
신영선 공정위 사무처장은 "퀄컴을 배타적 수혜자로 하는 폐쇄적인 생태계에서 산업 참여자가 누구든 자신이 이룬 혁신의 인센티브를 누리는 개방적인 생태계로 바뀔 것"이라며 "향후에도 공정위는 지식재산권의 정당한 행사는 적극 장려하되 SEP 남용 등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하고 소비자 후생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앞서도 공정위는 지난 2009년 퀄컴이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며 과징금 2732억원을 부과한 바 있다. 이에 퀄컴이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과징금 납부명령을 취소하라"는 퀄컴의 청구를 기각했다. 중국 경쟁당국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도 지난해 2월 퀄컴의 특허권 남용 행위에 대해 1조600억원가량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는 퀄컴에 대한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공정위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퀄컴은 이번에 한국 경쟁당국으로부터 또다시 초대형 제재를 받게 됐다. 천문학적인 과징금 외에도 퀄컴의 타격은 아시아 시장 특허 사용료 수입, 기업 신뢰도 등 측면에서 얼마나 클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세종=오종탁 기자 tak@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