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국내 출간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작가 설명부터 해야겠다.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생소한 이름이다. 혹 소설을 좋아하는 문학도들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이라는 점이 이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다.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외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추가 설명도 있긴 있다. 이것만으로 한 인물을 파악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조차 필명이다. 이 '얼굴 없는 작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2년 스릴러물 '성가신 사랑'을 내면서다. 걸출한 데뷔작을 남긴 작가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여러 기자들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2002년에 내놓은 '홀로서기'는 이탈리아에서 48주간 베스트셀러에 오른 대표작이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하루아침에 버림받은 여성의 심리를 솔직하게 묘사했다. 로베르토 파엔자(73)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 제6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경쟁부문에 오르기도 했다.
수십 년의 은둔의 세월을 보냈지만 오히려 그의 명성과 인기는 높아졌다. 그럴수록 미스터리한 정체를 파헤치려는 시도도 많았다. 지난 가을에는 작가의 신분을 두고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있었다. 한 이탈리아 탐사보도 전문기자가 독일문학 번역가 '아니타 라자(Anita Raja)'가 엘레나 페란테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페란테의 부동산 기록과 전속 출판사의 재무내역을 분석한 결과다. 이에 출판사는 즉각 "페란테와 출판사의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비난했다. '아니타 라자'를 사칭한 트위터까지 등장하면서 페란테의 정체를 둘러싼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페란테의 익명성까지 사랑하는 일부 팬들은 "제발 그를 내버려두라"고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베스트셀러 '미 비포 유'의 작가 조조 모예스(48)도 한 몫 거든다. "엘레나 페란테는 필명으로 글을 써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의 정체를 아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모든 '페란테' 열풍의 한가운데는 그의 최신작 '나폴리 4부작'이 있다. 이 작품으로 엘레나 페란테는 국제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2011년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 시작으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등 총 4권이 차례로 출간돼 전 세계 43개국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2014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지난해에는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스트레가상의 최종 후보가 됐다. 올 초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한강(46)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중 국내에는 1권 '나의 눈부신 친구'가 지난 7월에,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가 지난 12일에 출간됐다. 3권과 4권도 내년에 차례로 나올 예정이다.
작품은 '릴라'와 '레누'라는 두 여성의 60여년 간 지속된 우정을 다룬다. 이들의 유년기와 사춘기를 다뤘던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이들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청년기가 전개된다. 소설의 화자는 '레누'다. 조용한 모범생 타입의 '레누'와 달리 '릴라'는 영특함과 끼, 미모까지 갖춘 개성 강한 인물이다. 전후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두 친구는 애정과 질투, 경쟁과 의존 사이를 넘나들며 함께 성장해 간다. 2권에서 '릴라'는 불행한 결혼 생활으로 고통스러워하고, 항상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레누' 역시 실연으로 방황한다. 강간, 폭력, 외도 등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스런 경험은 여성에게 차별적이다 못해 적대적이었던 1940~60년대 이탈리아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후 국가의 재건, 격동의 60년대, 경제 부흥으로 인한 휴양 문화, 성의 해방, 물질 만능주의" 등 당시의 사회상 역시 읽어낼 수 있다.
'나폴리 4부작'은 페란테의 자전소설로 알려져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자신을 숨기는 데 그토록 철저했으면서도, 소설은 사적이고, 직설적이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페란테에 대한 단서를 모을 수 있다. 특히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친구 '릴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여성들에게만은 끔찍하게도 보수적이었던 나폴리를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썼던 '레누'가 페란테의 분신일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이메일을 통해서만 간간이 인터뷰에 응했던 페란테는 "나는 페미니스트를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 내가 본 여성들의 고통과 투지가 내 상상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별다른 광고 없이 120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다. 영국에서도 전체 소설 판매량이 줄어든 가운데, '나폴리 4부작' 덕분에 해외 번역 소설 판매만 두 배로 늘었다. 독자들은 '#ferrantefever(페란테 열병)'이라는 태그를 달고 페란테에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를 보낸다.
베일에 싸인 베스트셀러 작가만큼 매력적인 존재도 없다. 언젠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면 글쓰기를 그만두겠다고 페란테는 선언했다. 그의 작품을 계속 읽고 싶은 독자들은 당장의 호기심을 누르고 페란테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필명을 쓴 작가는 많다. '공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과 '해리포터'의 조앤 롤링도 각각 리처드 바크만과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으로 정체를 숨기고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써서 한 작가에게 절대로 두 번 주지 않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전설적인 사례도 있다. 페란테를 둘러싼 논란은 아마 그의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전에 페란테의 입장도 한 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진실을 밝히는 게 최선일까.
"책은 한 번 출간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필요 없다고 믿는다. 만약 책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다면 저자가 독자를 찾아 나서겠지만, 남아 있지 않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 엘레나 페란테 /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1만5500원)
(나의 눈부신 친구 / 엘레나 페란테 /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1만45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