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윤제림의 행인일기] 소리판에서

시계아이콘02분 01초 소요

[윤제림의 행인일기] 소리판에서 윤제림 시인
AD

이땅의 한 시절, 극장에 가면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야 했습니다. 영화를 보러가서도 '국민의례'를 하던 시절이었지요. 동해에 해가 떠오르고 을숙도에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화면을 지켜보면서 애국가가 다 끝날 때까지 서 있어야 했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잘 그려지고 있는 광경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오래된 기억입니다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일어서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개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꿈을 이루는 대목에서 그랬습니다. 다 죽어가던 영웅이 기사회생하여 우뚝 서는 장면에서 그랬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때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그 한 마디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힘껏 박수를 칩니다. '이제 우리 춘향이 살았다'는 안도감의 표현입니다. '변학도 넌 이제 죽었다'고 소리치며, 한껏 참았던 분노와 격정을 일시에 쏟아내는 승리의 함성입니다.


 알 수 없는 통쾌함과 짜릿한 전율이 있었습니다. 비루하고 답답한 일상에선 느낄 수 없는 쾌감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행복한 관객이었습니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숨겨진 메시지를 읽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미장센'은커녕 '크레디트 타이틀' 같은 용어도 몰랐습니다. 그저 입을 헤 벌리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침을 흘리며 보기도 했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소리판에서

 그냥 이야기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분석하고 평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스토리 속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보러 간 사람이면 모두 춘향이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춘향이의 일이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팔짱을 낀 구경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엊그제, 그런 맛을 보았습니다. 예술의 전당이 기획한 판소리 무대였지요. 저는 두 시간 내내 춘향이가 되고 심청이가 되었습니다. 심청이 아버지가 젖동냥을 다니는 대목에서 눈물을 질금거렸고, 어사 장모가 된 '월매'가 엉덩이춤을 출 때엔 따라서 춤추고 싶어졌습니다. 소리판이 끝났을 때는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쳤습니다.


 오랜만에 판소리를 현장에서 들었습니다. 아니, 그 판에 끼어 그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판소리는 창자(唱者) 혼자 힘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고수(鼓手)가 밀고 당겨주어야 하며, 관객이 들었다 놨다 해주어야 합니다. 함께 한 이들이 소리꾼의 기운을 어르고 추슬러주어야 합니다.
 그날의 판은 소리와 북, 그리고 추임새가 잘 어우러진 마당이었습니다. 한 소리꾼의 작품세계가 '하나의 국악장르'로까지 대접을 받는 이자람 씨의 소리판답게 시종 흥겨웠습니다. 그녀의 이름값을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일도 아닐 것입니다. 많이들 알다시피, 이자람 씨는 판소리가 전통적 형식과 규범에만 묶인다는 것은 너무나 밑지고 속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바탕을 지켜나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옛것의 미덕은 계승 발전시켜나가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년처럼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길을 찾아냅니다. 연극을 소리로 짜기도 하고, 소설을 무대로 옮겨내기도 합니다. 덕분에 젊은이들이 국악에 흥미를 갖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답게 세계가 관심을 갖게 합니다.


 문득, 이 하수상한 시절이 소리판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도자는 저 젊은 소리꾼처럼 자꾸 새로운 세상을 열어내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爲政者)들은 북 치는 이처럼 명창의 소리가 장강(長江)의 물결처럼 순리(順理)대로 흐르게 도와야겠지요. 그런 무대라면 관객들은 절로 신명이 날 것입니다. 추임새가 제 어린 시절 극장의 박수소리처럼 다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요즘, 광화문의 밤이야말로 엄청난 소리판입니다. 춘향과 이도령, 방자와 향단이와 월매가 손을 잡고 나옵니다. 심봉사와 청이, 죽은 곽씨 부인에 뺑덕어미까지 한 목소리를 냅니다. 흥부와 놀부가 어깨동무를 하고 광장에 모여 외치는 소리가 '적벽가'처럼 천지를 울립니다. 조금 더 있으면 산속 짐승들과 용궁의 물고기들까지도 몰려나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행복한 관객이고 싶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결말에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모두 한쪽을 바라보면서 어사 출도를 학수고대합니다.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기다립니다. 흥부의 박에서 무엇이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토끼도 자라도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추임새도 얼마든지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다', '얼씨구', '지화자'…'그렇지', '잘 한다', '이쁘다'.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이면 무엇이나 좋다고, 이자람 씨가 새삼스럽게 가르쳐준 것들입니다. 그런 소리들. 어서 외치고 싶습니다.


윤제림 시인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209:29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병원 다니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맛있는 걸 못 먹어서…." 지난달 14일 한 사기 피해자 커뮤니티에 올라 온 글이다. 글 게시자는 4000만원 넘는 돈을 부업 사기로 잃었다고 하소연했다. 숨어 있던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나타나 함께 울분을 토했다. "집을 부동산에 내놨어요." "삶의 여유를 위해 시도한 건데." 지난달부터 만난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이 학원비에 보태고자, 부족한 월급을 메우고

  • 25.12.0206:30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를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전문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부업 사기를 두고 플랫폼들이 사회적 책임을 갖고 게시물에 사기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를 추가

  • 25.12.0112:44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법 허점 악용한 범죄 점점 늘어"팀 미션 사기 등 부업 사기는 투자·일반 사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업 사기도 명확히 전기통신금융사기(보이스피싱)의 한 유형이고 피해자는 구제 대상에 포함되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합니다."(올해 11월6일 오OO씨의 국민동의 청원 내용) 보이스피싱 방지 및 피해 복구를 위해 마련된 법이 정작 부업 사기 등 온라인 사기에는 속수무책인 상황이 반복되

  • 25.12.0112:44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나날이 진화하는 범죄, 미진한 경찰 수사에 피해자들 선택권 사라져 조모씨(33·여)는 지난 5월6일 여행사 부업 사기로 2100만원을 잃었다. 사기를 신

  • 25.12.0111:55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기자가 직접 문의해보니"안녕하세요, 부업에 관심 있나요?" 지난달 28일 본지 기자의 카카오톡으로 한 연락이 왔다.기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 25.11.1809:52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지난 7월 내란특검팀에 의해 재구속된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동안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특검의 구인 시도에도 강하게 버티며 16차례 정도 출석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태도가 변한 것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증인으로 나온 지난달 30일 이후이다. 윤 전 대통령은 법정에 나와 직접

  • 25.11.0614:16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1월 5일) 소종섭 : 이 얘기부터 좀 해볼까요? 윤석열 전 대통령 얘기, 최근 계속해서 보도가 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군의 날 행사 마치고 나서 장군들과 관저에서 폭탄주를 돌렸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강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