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윤제림의 행인일기] 조계사에서

시계아이콘02분 07초 소요

[윤제림의 행인일기] 조계사에서 윤제림 시인
AD

 조계사는 지금 꽃 대궐입니다. 절 마당 안의 커다란 나무들과 돌계단, 갖가지 조형물들이 온통 국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눈길 가닿는 곳마다 꽃 장엄, 말 그대로 화엄(華嚴)입니다. 언뜻 보아도 수백 수천의 화분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꽃송이로 세자면 수천 수만일 것 같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국향이 온몸을 휩싸고 돌며 사람을 반깁니다. 쌍용의 꽃 장식이 눈을 어지럽힙니다. 밤에 보면 더 장관일 것입니다. 황홀하겠지요. 국화 송이 송이가 벌건 대낮에도 꽃 등불입니다.

 절에 피어난 꽃들답게 송이마다 사연의 명패들이 붙어있습니다. 어떤 꽃은 가신 이의 명복을 빌고 있고, 어떤 꽃은 부모의 건강이나 자식들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대부분 아들딸들을 위해 비손하는 글입니다.


 그중에도 대웅전 앞에 어사화(御賜花)가 꽂힌 사모(紗帽)형태의 장식물이 눈에 띕니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쓰던 그것 말입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언저리의 꽃들은 모두 대입수능시험 수험생들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무인생(戊寅生) 아무개, 대학합격 소원성취'거나 '정축생(丁丑生) 아무개, 대학수능 고득점 합격기원'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순간, 국화꽃 보는 재미가 조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이 생긴 꽃, 천편일률의 문구, 똑같은 희망과 기원….


 그런데, 딱 한 사람의 꽃이 달랐습니다. 생년(生年)과 이름만 있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이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니면 아빠엄마는 왜 아무런 기원의 말을 써넣지 않았을까. 이 울타리 안의 모든 꽃들은 예외 없이 수험생들의 것이니 이 아이 역시 수험생일 텐데.'


 별의별 상상을 다해보았습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까. 워낙 실력이 모자라서 합격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그저 요행이나 비는 모양이지. 그도 아니면, 그저 부처님이 굽어 살펴주시기만을 기도하려는 지도 몰라.'


 제 아이들이 대학시험을 보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내가 백일기도를 다녔습니다. 일하랴 살림하랴 허둥대면서도 틈만 나면, 정성껏 손을 모으고 절을 하더군요. 어느 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빌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참 멍청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몰라서 묻느냐거나 별 걸 다 묻는다고 핀잔이나 듣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뜻밖의 답을 했습니다. "점수가 어떻게 나오든지, 대학에 붙든지 떨어지든지… 그것을 우리 아이들 스스로가, 그리고 부모인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요."


 아, 그것은 제 아내의 30년 어록(語錄) 중에 가장 빛나는 한마디였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결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순응할 수 있게 해달라는 바람. 물론, 저희 부부가 말처럼 그렇게 달관의 경지를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내의 기도를 아직도 퍽 근사하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것에는 염치(廉恥)라는 것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터무니없는 욕심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문득 '빌다'라는 말의 사전적 풀이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나오더군요. '①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다. ②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호소하다.' 그리고 또 하나, '남의 물건을 공짜로 달라고 호소하여 얻다'.


 국어사전이 '비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①기도나 희망을 이뤄 주십사고 빌려면 ② 먼저 반성부터 할 일이다. 아들딸의 고득점과 합격을 빌기 전에, 자신이 그만한 성과를 기대할만한 부모인가를 먼저 짚어보라. 복(福)과 운(運)을 하늘에 빌자면, 스스로의 부덕(不德)과 불민(不敏)에 대해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


 저 이름만 써놓은 아이의 부모는 그걸 깨달은 사람일 것만 같습니다. 간절히 빌어보려던 꿈이 자신들에게 너무 크고 무거운 것임을 자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말들을 쓸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그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절대자 앞에 그냥 내려놓고 돌아선 것이었겠지요.


 모쪼록, 생년과 이름만 적힌 저 아이가 가진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저 여섯 글자의 기원이 대학입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아무 토를 달지도 않고 과도한 주문도 없는 저 꽃송이가, 백지수표처럼 엄청난 복록(福祿)을 부를 약속이 되면 더욱 좋겠습니다.


 여기 오는 길에 사들고 온 시집의 표지를 들여다봅니다. 아주 짧은 시 한편이 그대로 책 제목입니다.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김일로). 일 년의 의미가 새삼스러워집니다. 수험생들이 기다려온 일 년과 그 너머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일 년들을 생각합니다.


 기울어가는 일 년과 다가올 일 년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무엇을 빌어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윤제림 시인


[아시아경제 ]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209:29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병원 다니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맛있는 걸 못 먹어서…." 지난달 14일 한 사기 피해자 커뮤니티에 올라 온 글이다. 글 게시자는 4000만원 넘는 돈을 부업 사기로 잃었다고 하소연했다. 숨어 있던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나타나 함께 울분을 토했다. "집을 부동산에 내놨어요." "삶의 여유를 위해 시도한 건데." 지난달부터 만난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이 학원비에 보태고자, 부족한 월급을 메우고

  • 25.12.0206:30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를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전문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부업 사기를 두고 플랫폼들이 사회적 책임을 갖고 게시물에 사기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를 추가

  • 25.12.0112:44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법 허점 악용한 범죄 점점 늘어"팀 미션 사기 등 부업 사기는 투자·일반 사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업 사기도 명확히 전기통신금융사기(보이스피싱)의 한 유형이고 피해자는 구제 대상에 포함되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합니다."(올해 11월6일 오OO씨의 국민동의 청원 내용) 보이스피싱 방지 및 피해 복구를 위해 마련된 법이 정작 부업 사기 등 온라인 사기에는 속수무책인 상황이 반복되

  • 25.12.0112:44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나날이 진화하는 범죄, 미진한 경찰 수사에 피해자들 선택권 사라져 조모씨(33·여)는 지난 5월6일 여행사 부업 사기로 2100만원을 잃었다. 사기를 신

  • 25.12.0111:55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기자가 직접 문의해보니"안녕하세요, 부업에 관심 있나요?" 지난달 28일 본지 기자의 카카오톡으로 한 연락이 왔다.기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 25.11.1809:52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지난 7월 내란특검팀에 의해 재구속된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동안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특검의 구인 시도에도 강하게 버티며 16차례 정도 출석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태도가 변한 것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증인으로 나온 지난달 30일 이후이다. 윤 전 대통령은 법정에 나와 직접

  • 25.11.0614:16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1월 5일) 소종섭 : 이 얘기부터 좀 해볼까요? 윤석열 전 대통령 얘기, 최근 계속해서 보도가 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군의 날 행사 마치고 나서 장군들과 관저에서 폭탄주를 돌렸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강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