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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18)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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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18)마재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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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馬峴)에 왔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옛날엔 광주 땅이었으나 지금은 남양주군이지요. 선생께서는 태어나서 15년, 유배에서 돌아와 18년, 생애의 절반쯤을 여기서 보내셨습니다. 산색(山色)과 물빛이 곱고 투명해서 가을을 느끼기에 아주 그만인 곳이지요. 아름다운 강마을입니다.


강진의 초당에서도 자나 깨나 그리워하시던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쓰시던 호(號)에서도 이곳 마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열수옹(洌水翁)', 곧 '한강 늙은이'라 칭하셨지요. 몸은 천리 밖 남도에 계셨지만 마음은 늘 이곳 한강수와 함께 하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다산의 고향 그리는 마음은 참으로 각별한 가족 사랑으로도 표현됩니다. 귀양살이를 하는 집안의 자식들이 행여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끊임없이 편지를 보냅니다. 그 먼 곳에서도 자식들의 공부와 성장에 대해 사랑과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편지로 세상 모든 이야기를 다합니다. 농사짓는 법, 생활의 지혜, 사람답게 사는 이치와 선비의 도리 등등. 폐족(廢族)도 성인(聖人)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며 두 아들에 용기를 줍니다. '몸을 움직이는 태도, 말씨, 얼굴빛'을 항상 바로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짓(大惡)이나 비뚤어진 길(異端), 잡스런 일(雜術)에 홀리기 쉽다고 말합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18)마재에서


마침 이곳 실학박물관에는 선생이 가족에 기울인 애정의 농도를 가늠하게 하는 물증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하피첩의 귀향-노을빛 치마에 새긴 다산 정약용의 가족사랑'이란 특별전입니다. 보물이 된 친필서첩을 그의 고향에서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피첩'은 참으로 애틋한 사랑의 산물이지요. 그것은 1810년, 그러니까 다산의 강진 유배생활이 10년째 되던 해에 만들어졌습니다. 두루 알다시피, 부인 홍씨가 귀양지로 보내온 여섯 폭 치마를 잘라낸 것으로 꾸민 서첩입니다. 붉은 치마 '하피', 그것으로 이룬 글 묶음이라서 '하피첩'이란 어여쁜 이름이 붙었지요.


오늘 그 진품을 보았습니다. 하마터면 종적도 모를 뻔 했던 것,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된 것, 이 전시가 끝나면 다시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돌아가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라지요. 다산선생의 온갖 서체가 어우러진 명품을 직접 보게 된 것은 퍽이나 큰 행운입니다.


친필에서 선생의 육성(肉聲)을 듣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 그러나 가난을 구제하고 삶을 넉넉하게 할 두 글자 부적을 줄 것이니, 너희들은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하나는 '근(勤;부지런함)'이요 다른 하나는 '검(儉;검소함)'이다 '근검'. 이 두 글자는 논밭보다 좋은 것이어서 평생 쓰고도 남는 것이다."


학정(虐政)에 시달리는 백성의 아픔을 보면 눈물로 써내려가던 그 글씨입니다. '사람들이 가마 타는 즐거움만 알고, 가마 메는 사람의 괴로움은 모른다'고 안타까워하시던 어른다운 말씀입니다.


다산의 인간애(人間愛)는 '가족에 대한 가장(家長)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수신제가'(修身齊家)로 익히신 분이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제 식솔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타인의 처지를 살필 수 있겠으며,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 하겠습니까.


선생의 편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먼저 가정생활을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만약 옳지 못한 점을 발견할 때는 거꾸로 자기 자신에게 비춰보고, 나도 아마 이러한 잘못을 하지 않나 살펴본 후 자신은 그렇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정을 올바로 건사하는 일이 사회적 활동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삶의 에너지를 가정과 가족들로부터 공급받는 사람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은 두루 믿음직스러울 것입니다. 아니라면, 생활은 외롭고 생각은 일그러지기 쉽겠지요.


선생은 사위에게도 살가운 사랑의 인사를 전하여 힘을 실어줄 줄 아셨습니다. 멋지고 자상한 장인이었지요. 이곳 마재로 장가들러 오는 그를 한 마리 새에 비유하여 멀리서나마 시를 써서 반겼습니다.


포롱포롱 날아온 새/우리 집 매화가지에 쉬는구나.//꽃향기 짙으니/그래서 찾아왔겠지.//여기 머물고 깃들어/네 집안을 즐겁게 하려무나.//이제 꽃 활짝 피었으니/열매도 많이 열리겠네.//


시집가는 딸을 위해 그려 보내신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 에 담긴 시입니다. 선생은 어쩌면, 가족을 사랑하고 그 가족들로부터 돌려받은 사랑의 힘으로 유배를 견뎠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이기에 결혼 60년을 기리는 잔치(回婚禮)날,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먼 길을 가셨을 테지요.


이 풍진(風塵)세상에도 선생의 고향마을 가을빛은 사뭇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합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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