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장애인이 많이 등장한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 '앉은뱅이'…. 기적이 일어나 이들을 눈 뜨게 하고 듣게 하고 말하게 하고 일어나 걷게 한다. 이런 기적은 신약, 특히 '4복음서(마테오, 마르코, 루카, 요한)'에 빈번히 등장한다. 구약의 '이사야'에도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는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는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요즘 같았으면 복음서의 저자들이 하루도 편치 못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장애인을 나타내는 말에 모두 비하의 뜻이 담겼기 때문이다. 아마 장애인 단체에서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할 것이다. 위에 나온 말들은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지체장애인', '하반신장애인'으로 써야 한다. '외팔이'도 지체장애인이다.
나는 처음에 장애인 단체 같은 곳에서 비하어로 지정한 낱말이 모조리 순우리말이라는 점을 깨닫고 내심 분개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말의 지위란 형편없는 지경이 되어 '언문'이나 '암클'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제는 금칙어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으니 어쩌랴. 그러나 모든 부름은 듣는 이의 감정이 최우선이니 불평하지 말지어다.
장애인을 부름에 이토록 애틋하니 그들을 대하기도 그러해야 하리라. 그러나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매 휠체어 타거나 목발 또는 지팡이를 짚은 이가 안심하고 다닐 곳이 많지 않다. 계단은 가파르고 문턱은 높고 사람들은 스마트폰 액정에 시선을 파묻고 앞을 보지 않는다. 나라면 부르는 말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전에 문턱을 없애 달라고 할 것 같다.
예수가 길을 가다 시각장애인을 만났다. 제자들이 묻는다. "저 사람이 눈이 먼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당시 유다 사람들은 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예수는 "자기의 탓도 부모의 탓도 아니다.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다"라고 대답한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일거에 전복하는 놀라운 말이다.
장애인은 외견상 남다른 존재다. 이 남다름은 곧잘 남다른 능력으로 나타난다. 예술작품 같은 데서 등장인물이 지체장애인(외팔이)이면 대개 보통 사람이 아니다. 비록 몸에는 장애가 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절륜한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이소룡이 스크린을 주름잡기 조금 전, 같은 요금으로 영화 두 편을 보여주던 서울 변두리의 재개봉관을 누빈 내 어린 날의 슈퍼스타가 있다. 왕우(王羽). 그는 1967년에 나온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스타덤에 올랐다. 평론가들은 왕우가 홍콩무협영화에 권법무술을 도입해 훗날 이소룡이 등장하는 토양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왕우는 '용호투'(1970)에서 맨손 결투를 처음으로 연기했다. 홍콩무협영화의 주인공들이 하늘을 붕붕 날던 시절이다. 맨손 결투의 효시로 꼽히는 이 작품은 한국의 남한산성에서 촬영했다. 그 왕우가 지난 2013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우리 관객을 만났다. 영화에서 왼손만으로 적을 제압하던 그는 중풍에 걸려 오른손을 쓰지 못했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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