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스토리 - 그녀가 '송도(개성)3절'이라 자칭한 까닭…난 자유영혼이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황진이는 박연폭포와 화담 서경덕,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송도 3절(絶)이라 일컬었다. 절(絶)이란 ‘더 이상 없는 것’으로서 베스트를 말한다. 대단한 '자뻑'임에 틀림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100% 수긍을 했다.
박연폭포는 풍광이 기이하고 아름답고, 화담은 학문과 인격이 높았다면 자신은 무엇이 베스트라고 생각하였을까.
세상의 관행에 개의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과 자유로움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천하의 남자들을 대적하고 농락한 일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한양까지 떠들썩하게 한 명성을 만들어낸 ‘기생다움’을 스스로 그렇게 평가한 것일까. 애향심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송도(개성)의 최고 경물인 박연폭포를 3절에 포함시킨 것으로, 그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여인은 빼어난 시인답게 폭포 풍경을 생생하고 우렁차게 그려낸 시 한편을 남겼다.
하늘이 뿜은 한 갈래 물길이 골짜기를 숫돌처럼 가는 듯
용이 사는 연못으로 백 길이나 되는 물이 모이고 모이네
날아온 샘물이 거꾸로 쏟아지니 은하수가 아닌가 싶고
성난 폭포가 가로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가 굽었다
우박이 튀고 천둥이 달리니 골짜기가 꽉 찼고
구슬 절구에 옥을 빻으니 맑은 하늘까지 환하다
풍류객들이여 (중국의) 여산이 낫다고 말하지 말라
누가 해동의 으뜸인 천마산을 알겠는가
一派長天噴壑? 龍湫百?水??
일파장천분학농 용추백인수종종
飛泉倒瀉疑銀漢 怒瀑橫垂宛白虹
비천도사의은한 노폭횡수완백홍
雹亂霆馳彌洞府 珠春玉碎澈晴空
박란정치미동부 주춘옥쇄철청공
遊人莫道廬山勝 須識天磨冠海東
유인막도여산승 수식천마관해동
박연(朴淵)
하늘이 뿜은 한 갈래 물길이 골짜기를 숫돌처럼 가는 듯 하다는 이런 표현은 아무 감관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통찰력과 표현력이 어우러져야 가능한 절창이다.진이는 이런 감각적인 표현을 능란하게 할 수 있는 대시인이었다. 그녀는 송도(지금의 개성) 자체에 대한 시도 남겼다. 지금은 길이 막힌 개성공단이 있는 그 도시는, 고려의 수도였고, 황진이의 자부심이었다.
눈 속에 지난 왕조(고려)의 빛깔이 숨어있고
차가운 종소리에 옛 나라의 소리가 담겼네
남쪽 누대에 쓸쓸히 홀로 서 있노라니
허물어진 성곽에 저녁 안개가 피어나네
雪中前朝色 寒鐘故國聲
설중전조색 한종고국성
南樓愁獨立 殘廓暮煙生
남루수독립 잔곽모연생
송도(松都)
그녀는 왜 개성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그녀는 정신과 육체가 철저히 고려 여인이었다. 지금의 서울인 한양의 정권에서 뭔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고려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개성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유학자 서경덕과 통하는 점이 많다. 두 사람은 학문과 인품의 소통 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왕조가 바뀌어 한양이 나라의 중심이라며 들먹거리지만, 고색이 창연한 개성이 역사적 자존심을 지닌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녀는 한낱 ‘지방 기생’이 아니라, 송도라는 ‘문화중심지’를 기반으로 피어난 전국적인 스타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송도에 관한 그녀의 시에는 그러나 사라진 것들에 대한 비감이 서려있다. 아무리 고려를 자랑해도 현실은 현실이 아닌가. 눈 속에 고려 빛깔이 서려있다는 대목은 참 멋지다. 청자의 푸르스름한 기운과 응달의 눈이 지닌 색깔이 닮아있지 않던가. 특히 눈을 시리게 하는 맑음이 닮았다. 차가운 종소리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시절에 대한 회억이 아닐까. 청자와 불교.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을 열 글자에 아름답게 그려냈다.
남루(南樓)는 옛 선비들이 들끓던 곳인데, 이젠 아무도 없고 황진이 혼자 올라가 쓸쓸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산을 이은 성곽들은 최근엔 정비하지 않아 허물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마치 전성기의 옛 병영처럼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실은 연기가 아니라, 저녁답의 안개일 뿐이다. 군소리 하나 없이 깔끔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황진이가 너무도 개성을 잘 알고 또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가장 낯설고 가장 자유로운 황진이를 만나러 갈 때가 됐다. 이 기생에 관한 입담들은 대개 이 지점 쯤에서 그치지만, 그래서 황진이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서는 셈이다.
조선에서 가장 예쁜 여자 황진이는 행복하게 살았는가? 이 질문은 황진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붙들리는 에피소드들과 증언들을 취합해서 간결히 말한다면, ‘아니다’이다. 황진이는 행복하지 않았다.
500년 전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렇게 간단히 평가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거친 방식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황진이의 유랑생활’을 그 이유로 들고 싶다. 당대를 떠들썩하게 한 황진이의 명성은, 그녀의 출세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자에 대한 경멸과 경쟁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국색(國色)이란 소릴 들을 만큼 예뻤지만 별로 즐겁지 않았다.
몸뚱이란 것이 무상하며 사내들의 관심은 곧 돌아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육체를 아끼지 않았다. 마음이 동하면 서슴없이 동침했다. 기생들이 즐기는 화장을 삼간 까닭은 워낙 피부가 고와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꾸밈이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진이는 평생 버림받은 눈 먼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냉정한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여자의 운명을 동정하고 남자를 철저하게 불신했다. 그녀는 한 꺼풀만 벗기면 욕망으로 가득 찬 위선적인 인간들을 가차없이 공격하고 조롱했다. 나는 이것이 황진이의 중요한 실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모들이 ‘황진이 콤플렉스’를 이룬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그림자만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여인은 시와 예술을 뜨겁게 사랑했다. 소세양과 김경원을 사랑한 것은 시를 사랑한 것이며, 이언방과 이사종을 사랑한 것은 예술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학문을 좋아했다. 화담에게 바친 경배는, 물론 ‘사전 테스트’가 있긴 했지만 깨우침을 갈구하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것이었다.
황진이가 지닌 특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체성’과 ‘자유’였다. 그녀는 남성에게 의지하거나 기생하여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남성은 철저히 ‘파트너’였다. 좋은 남자가 있으면 스스로 찾아갔다. 사랑을 위해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썼다. 그녀에게는 ‘경멸’은 있되 ‘내숭’은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황진이는 기생 중에서 보기 드문, ‘자기 삶의 주체적 경영자’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대로 천하의 남자들을 위해 자신을 내놓다 보니,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녀의 주체성을 억누르는 시대의 공기에 괴로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황진이는 자유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느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자유를 예술에서, 시에서, 학문에서, 사랑에서 찾으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조선기생이 누릴 수 있는 자유란 것이 황진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정적인 삶을 팽개치고 유랑을 떠난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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