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사회, 희망으로 극복하자 1. 정부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전문]
'무신불립(無信不立)'.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정부에 대한 신뢰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정부의 신뢰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공공정책의 성공 가능성이 낮아 수많은 비용을 소모해야 한다. 정부가 공익을 위해 뭘 하나 하려 해도 국민들이 믿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기 힘들다. 또 조정자ㆍ중랍자 역할을 해야 할 정부가 신뢰를 잃게 되면 사회ㆍ정치적 갈등 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해 그 사회는 끊임없는 불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바닥이다. 정부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똬리를 튼 불신 기조는 공동체의 존립 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경제적으로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불신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결국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
불신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만 잘 사면 된다'거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의식이 강하게 퍼질 수밖에 없다.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협력'이나 '협치'는 말장난에 그칠 공산이 크다. 시민들과 전문가들은 끊임없는 소통과 투명성 강화, 제대로 된 반성과 보완, 소신있는 정책 결정ㆍ집행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본문]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 이 말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가만히 있으라'는 선원들의 말을 믿고 선내에 머물렀다가 304명의 승객들이 참사를 당한 후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졌다.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정부에 대한 불신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실제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낮은 신뢰도는 여러 차례 조사 결과에서 입증되고 있다. 지난해 8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조사 결과 2014년 기준 우리나라 10명 중 7명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터키, 브라질보다도 낮은 수준이었다. 한국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34%로 조사 대상 41개국 가운데 중하위권인 26위에 머물렀다. OECD 평균 정부 신뢰도 41.8%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우리 국민들이 흔히 얕잡아 보는 개발도상국들인 인도네시아 5위(65%), 터키 10위(53%), 에스토니아 22위(41%), 브라질 24위(36%) 등보다도 못했다. 한국보다 정부 신뢰도가 낮은 국가는 주로 'PIGS(포르투갈ㆍ이탈리아ㆍ그리스ㆍ스페인)'로 불리는 재정위기 국가들이다.
또 다른 조사인 글로벌 홍보기업 에델만의 '2015 에델만 신뢰 바로미터'에서도 한국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39%로 조사대상 27개국 중 17위에 그쳤다. 아랍에미리트(89%)와 중국(85%), 인도(85%), 인도네시아(73%) 등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에 대해 우선 오락가락하는 정책적 혼란이 이유로 꼽힌다. 최근 미세먼지 원인ㆍ대책을 놓고 정부 각 부처들이 벌이고 있는 혼란스러운 행태가 대표적 사례다. 환경부는 지난달 말 '고등어ㆍ삼겹살'을 '국민건강을 해치는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지적했다가 고등어값이 폭락하는 등 난리가 벌어지자 뒤늦게 지난 8일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말을 바꿨다. 정부는 이른바 '클린디젤'을 친환경차라며 각종 혜택을 부여하는 등 적극 보급에 나섰다가 미세먼지 증가의 주원인으로 꼽히자 뒤늦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을 뒤집어 국민들을 혼란시켰다.
정부의 정책이 오락가락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여파로 국내에 수입된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던 2013년 8월,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방사능 오염 가능성을 경고하는 여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말라. 엄단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정 총리는 한 달 뒤 말을 바꿔 일본의 8개현에서 수입되는 수산물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방사능 검사 결과 위험한 수준의 오염물질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의 정부의 태도도 불신이 고조된 계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5월 유가족들을 초청해 "언제든지 찾아 와라"고 말했지만 이후 말을 바꿔 단 한 번도 초청하거나 만난 적이 없다. 정부 각 부처들도 세월호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활동을 협조하지 않는 등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9ㆍ11 사태 이후 조지 부시 대통령까지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해 조사를 받은 것과 극명히 대비되는 일이었다.
지난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질병에 대한 정부의 선제적 대응과 초동 대응이 미흡했던 것이 화를 키우면서 국가 전체를 신뢰 부재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정부가 각종 정책이나 사고 수습 과정에서 오락가락하거나 거짓말, 책임 회피, 발뺌 등으로 일관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하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며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알 권리를 존중하면서 아래로 내려와 섬기고 봉사하는 자세로 돌아와야 신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소신있는 결정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불신은 예전처럼 정치권ㆍ공무원들의 사생활 문제나 도덕성ㆍ부패 등이 원인이 아니라 정책에 대한 불신이므로, 정책의 품질을 높이고 독립성ㆍ일관성을 보장해 줘야 신뢰도가 향상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현재처럼 1~3급 고위 공무원들의 인사를 모두 최고권력기관에서 일일이 간섭하는 상황에서는 승진에만 신경 쓰는 '영혼없는' 공무원들만 양산돼 신뢰도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임승빈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요즘 공무원들이 옛날보다 훨씬 높은 경쟁을 거쳐 선발되기 때문에 실력이 더 좋지만 소신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지 않아 좌고우면하면서 눈치만 보고 있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경청하면서 일리가 있으면 반영하고, 정책 발표 전 충분히 공론화해 의견을 수렴하고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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