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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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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낱말의 습격'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온라인쇼핑이나 tv홈쇼핑에 맛 들이기 시작하면서, 구매시점과 상품 접촉시점의 차연(差延)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생겨났다. 판매자가 제품을 발송했다는 메일이 뜨면서 언제 도착할지 어디까지 와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 배송 이력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물건도 있고 어느 한갓진 배송 창고에서 잠을 자며 대기하는 물건도 있다.


상품이야 기다리면 당연히 오는 것이고 또 그 기간의 차이라 해봤자 특별한 배달사고가 아니라면 하루 이틀 사이인데도, 이토록 그 사정을 살피려 하고 기다림을 연막처럼 피우는 까닭은 뭘까. 컴퓨터나 tv 속에서 보았던 물건과 내 손에 쥐어질 물건과의 차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불신심리도 있겠고, 이미 내것이 되었으나 내 손에 닿지 않은 것에 대한 소유나 장악 욕망같은 것도 있으리라.

택배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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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물건을 기다리는 2-3일 동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설렘같은 게 있다. 인간과 물건 사이 서로에게 닿고자 하는 자력이 달콤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내게로 오는 것과 내 마음의 손을 내벋는 것, 그것 사이에 감도는 상상력과 긴장감. 어쩌면 정작 만져질 물건보다 이 차연의 감미로움을 즐기려고 택배 주문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기분은 오래전 맛 보았던 어떤 기억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연애 편지 말이다.


내가 편지를 보내면 며칠이 지나 그녀가 받아보고, 그 편지를 읽고난 뒤 그녀는 오랜 망설임 끝에 다시 편지를 쓰고, 썼다 찢고, 다시 쓰고, 그래서 답장을 보내면 그것이 다시 며칠간 우체국 배송시스템과 우편배달부의 손을 거쳐 내게로 돌아온다. 그 길고 지루하며 답답하고 먹먹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는가. 그 시간 동안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워하고 상상하고 지우고 다시 설레며 사랑의 한 생애를 고스란히 살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녀가 내게 도착하기 전에, 이 느린 택배시스템이 만들어준 사랑의 자력이 나와 그녀를 분발시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지 않았던가.


그 연애편지의 사랑이 한낱 음향케이블이나 인터넷공유기 따위의 잡동사니 러브로 바뀐 점은 다소 분하지만, 영화 '그녀(her)'의 오퍼레이션 시스템 연애보다는 그래도 고전적인 맛이 있다. 모르겠다. 앞으로 사랑도 택배로 주문하는 날이 올지도. 그리고 그것이 제 날짜에 오지 않아 애태우며 배송추적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 올지도. 택배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벗들이 상상해 보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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