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는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는 못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선거권의 경우 우리나라는 만 19세이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만 18세 이상이면 투표를 할 수 있다. 피선거권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는 만 25세, 대통령선거는 만 40세면 입후보할 수 있다. 알다시피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성별, 교육, 소득, 종교 등을 이유로 제한하지 못한다. 이번 4ㆍ13 총선에 출마한 후보 중에는 직업이 통닭배달, 배관공인 이들도 있다. 또 1인1표 원칙에 따라 재벌 사장이나 포장마차 주인이나 모두 한 표를 던진다.
하지만 아무나 선거에 나서는 건 아니다. 작년 말 통계청 발표 국민 평균 순자산은 약 2억 8000만원인데 이번 총선 비례대표 후보 평균 재산이 21억4000만원이라니 거의 여덟 배다. 뿐만 아니라 인구의 절반인 여성은 지역구 후보 중 10.1%에 불과하다. 또 아무나 투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헌법 24조에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돼 있지만 엄밀히 말해 '모든' 국민이 아니고 일정 연령 이상의 국민 즉 성인에게만 선거권이 허용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3 학생들은 전 세계 170개국의 동년배 학생들과 달리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또 성인이라고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이, 심각하게 징역을 살거나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투표권이 박탈된다. (수형자의 선거권 제한 위헌 결정에 따라 올해부터는 구치소 수감자들도 투표할 수 있다.)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못한다는 괴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의(代議)의 본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의란 말 그대로 의사를 대신 표현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정치인을 유권자의 대리인(delegate)으로 보고 유권자들의 이익과 견해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대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최고의 정치인은 유권자들과 가장 닮은 사람이다.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데는 노동자만큼 적합한 대리인이 없을 것이다. 낙후된 지역을 대변하려면 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지역의 고충을 잘 아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이다. 미래세대를 대변하기 위해 투표 연령을 낮추자는 움직임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은 정치인이 단순히 유권자의 이해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판단으로 유권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제시하는 신탁인(trustee)라는 것이다. 그러면 유권자들과 닮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다른 사람이 낫다. 유권자들보다 더 높은 학식과 인품을 갖춰서 당장의 이익에 매이지 않고 보다 넓은 시야에서 장기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국회로 보내야 할 것이다. 군중심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론조사가 얼마나 허술한지 떠올리면 냄비 여론에 오락가락 않고 일관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쉬울 것이다. 대의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피선거권 연령이 선거권 연령보다 높은 데서도 드러난다. 국가수반인 대통령 피선거권은 미국과 인도는 35세, 독일은 40세 등 선거권 연령보다 훨씬 높다.
문제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충돌할 때가 아니라 각각 극단으로 치달을 때다. 만약 유권자와 꼭 닮은 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려면 굳이 선거가 필요 없다. 고대 아테네처럼 유권자 중에 추첨을 하거나 요즘 같은 빅데이터 분석 시대에 유권자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기술로 누가 되든 그 분석 결과에 따르면 될 것이다. 반대로 유권자들보다 뛰어난 혜안으로 앞날을 헤쳐 나갈 인물을 찾는다면 아예 철인정치에 맡기거나 아니면 알파고 대통령을 개발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가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로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고 (과연 우리는 모든 국민에게 진정한 정치 참여의 권리를 부여하고 있는가), 정말로 아무나 정치를 해서는 안돼야 한다 (과연 우리는 공동체의 결정과 선택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을 선출하고 있는가).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한 세대의 민주주의 경험을 통해 이제 정의, 아니 <대의란 무엇인가>라는 베스트셀러가 나올 시점인 듯하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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