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제훈 기자] 김한길(62) 국민의당 의원(4선·서울 광진구갑)이 17일 야권연대 무산에 책임을 지고 20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혁신정치가의 아들로 태어나 야권 비주류의 좌장, 제1야당의 대표까지 지낸 김 의원의 다사다난한 정치사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고(故) 김철(1926~1994) 통일사회당 당수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 의원은 혁신계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린시절부터 적잖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해 왔다.
이후 김 의원은 도미(渡美) 생활을 거쳐 1991년 베스트셀러인 '여자의 남자'를 발표하면서 유명세를 얻었고, TV프로그램 진행 등으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김 의원은 1992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통일국민당에서 부대변인을 맡아 14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뒤이어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입제안을 받아들여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전국구)로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야당인사가 된 김 의원은 1997년·2002년 대선에서는 미디어 분야를 총괄, 김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헀다. 김 의원은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최대계파인 정동영계에 몸을 담고 원내대표까지 지내는 등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여권(당시 열린우리당)이 처참한 성적표를 보이면서 김 의원은 노 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 의원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23명의 의원과 동반 탈당해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하면서 노 전 대통령 및 친노세력과 결별했다. 뒤이어 김 의원은 민주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을 만들었다가, 다시 동료의원들을 규합해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했다.
김 의원은 당시 중도통합신당 창당과 관련해 지난 1월 기자간담회에서 "당시(2007년 대선 직전) 열린우리당 분위기는 지지율이 낮으면 패배하는게 당연하다, 당당하게 패배하자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며 "당내에서 다른 시도를 통해 정권교체 가능성을 피우자는 분위기가 있었고, 탈당을 결심한 의원들이 제게 이끌어주는 선배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같이 (탈당) 하게된 것이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18대 총선에서 불출마를 선언한 김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서울 구로구을에서 광진구갑으로 변경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8대 대선에서 패배하자 이듬해 전당대회에서 그는 정치입문 20여년 만에 제1야당의 당수로 올라섰다.
제1야당의 당수가 된 김 의원은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이끌었던 새정치연합과의 합당을 추진, 새정치민주연합을 탄생시키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이 2014년 지방선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당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고,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면서 김 의원은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권토중래를 노리던 김 의원은 지난해 새정치연합의 분당국면에서 탈당을 결행했고, 안 대표와 손잡고 제3정당인 국민의당 창당에 나섰다.
김 의원은 당시 "패권주의의 틀에 갖혀 주저앉아서 뻔히 패배가 예상되는데 그 패배는 기다리고만 있는것은 내가 선택할 길이 아니다"라며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제가 정치하면서 지켜온 원칙이고 실천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의당 지지율이 하락추세를 보이면서 김 의원과 안 대표는 '야권연대'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고, 김 의원은 자신의 야권연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대위원장 사퇴 등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야권연대에 있어 유사한 입장을 취한 천정배 대표가 당무 거부를 풀고 합류하자 정치적 입지가 고립무원에 빠졌다. 이날 김 의원은 탈당 등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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