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를 찾아서'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1933년 왕수복(王壽福, 1917- 2003)은 기생 가수로 데뷔하여 일약 스타가 된다. 그녀 나이 17세. 그녀가 부른 노래 ‘인생의 봄’ ‘고도의 정한’이 실린 음반은 무려 120만 장이 팔려나가면서 대박을 터뜨린다. 왕수복은 지역 기생본부인 권번(券番)에서 차린 평양기생학교의 우등생으로 연예인이 되어 조선의 노래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의 가치에 눈을 떴다. 그녀의 한달 수입은 800원이나 됐다.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돈이다.
잡지사 기자들이 이 여자를 만나려면 몇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늘 낮 12시쯤 되어야 깨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인기가수에게 불평하는 기자는 없었다. 만나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왕수복은 어느 날 간도 연길(延吉)로 만주 조선인 위문공연을 떠난다. 1년 뒤에 들어온 유명 기생가수 선우일선과 함께였다.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중국 마적들이 습격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관객들을 꽉 찼던 극장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왕수복은 군중 사이에 떠밀려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골목으로 미친 듯이 뛰어 달아났다. 동료도 모두 잃어버렸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어느 허름한 집 밑에서 낙담하고 있는데 문득 작사가였던 왕평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공포감이 되살아나서 덜덜 떨면서 그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은 동료들을 찾아나섰다. 겨우, 곳곳에서 헤매고 있던 이들을 찾아내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묵는다.
그런데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마적단이 다시 이 여관을 급습했다. 황망한 지경에 처한 조선 연예인단은 어떻게 했을까. 여관 주인인 일본인이 달려와 그들에게 총 몇 자루를 건넸다. 함께 싸우자는 제의였다. 두 여가수도 엉겁결에 총자루를 메고 담벼락에 붙었다. 무서움을 진정시키려고 아무렇게나 마구 쏘아댔다. 다행히도 이 불꽃 튀는 접전 끝에 마적들이 도망가버린다.
그런 홍역을 치른 뒤인 이튿날 다시 공연을 했다. 목숨을 걸고 노래를 부르는 셈이었다. 동포들의 환호가 조마조마한 왕수복의 가슴을 진정시켜주었다. 그리그리 하여 다행히도 무사히 공연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밤중에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데 인적없는 으슥한 길에서 육혈포(권총)와 몽둥이를 든 사내 두 명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와 차를 세운다. 그들은 당장 흉기로 내려칠 듯이 위협을 하면서 돈과 패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어보니, “우리는 공산당원이다”라고 대답했다. 자동차 뒤쪽에 타고 있던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떨고 있었다. 혹시 여자들을 붙잡아갈까 걱정했던 까닭이다. 앞쪽에 타고 있는 남자동료가 바깥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더듬거리며 “우린...조선민족 위문공연단...이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바깥에서 “그럼 돈이 많겠네”하고 팔뚝을 내밀어 차에 탄 동료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마침 뒤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앞에 차가 서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던지 뒷차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총성도 울렸다. 그러자, 차에 막 올라왔던 공산당원들은 당황하여 급히 뛰어내렸고 옆으로 펼쳐진 깜깜한 숲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자동차는 달리기 시작했고, 뒤에 두 여인을 덮은 담요는 꿈틀꿈틀거렸다. 왕수복과 선우일선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흑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어쩌면 왕수복의 생애에 하나의 복선이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나중에 공산당의 영웅이 된다.) 이렇게 몇 바탕 혼쭐이 난 뒤 그녀들은 경성으로 돌아왔다.
193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 왕수복. 그녀의 사진을 들여다 보면 전형적인 미인의 얼굴은 아니다. 눈이 크고 약간 통통하고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목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짧아 요즘의 미적 기준으로 보면 못미친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슴이 크고 하체도 균형있게 발달해서 육감적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유명세이긴 하겠지만, 그녀가 곰보라는 소문도 돌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공연을 마치고 나오면 극장 문에서 기다렸다가 이 여자가 진짜 곰보인지 확인하려고 눈을 비볐다. 군중이 몰려들 때 왕수복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왜 길을 막아요? 호호호. 제가 곰보인가 해서요? 자 어서 가까이 나와서 자세히, 자세히 좀 보세요. 내가 진짜 곰보인지 째보인지...” 그러자 한 중년 부인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실례하겠습니다”라면서 왕수복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본다. “아이구머니나. 내가 헛소문을 듣고 속았댔구나. 여러분, 곰보...아니예요.” 이쯤 되면 좌중에 폭소가 터져나온다. 당시 그녀가 뜰 수 있었던 것은 ‘비주얼’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재능 덕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면에서 화전을 일구는 농부였다. 아버지가 지어준 첫 이름은 성실(成實)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가 병사하자, 할머니는 오래 사는 게 최고라면서 ‘수복’으로 바꿨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가족들은 평양 시내에 있는 큰 이모네에 얹혀살았다. 일곱 살 때부터 왕수복은 일자리를 얻는다. 교회에 일을 다니는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부잣집 아이를 시중드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녀는 그 아이를 ‘모시고’ 유치원에 따라갔는데 거기서 풍금 치는 교사를 보고 감탄한다. 교실 바깥벽에 붙어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따라불렀다. 수복이 어느 날 창문 너머로 배운 노래를 읊조리고 있을 때 풍금교사가 문득 들었다. “어머나. 너 노래 참 잘하는구나. 목소리도 곱고!” 교사는 그녀를 명륜여자공립보통학교 음악선생인 윤두성에게 소개해준다. 오디션을 해본 윤두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수복을 따로 불러 발성연습을 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은 공립보통학교의 학비를 낼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수복이 그 학교에 다시는 가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대신 먼저 기생이 되어 있었던 언니를 따라 기생이 되기로 했다. (언니는 평양에 방가로(放街路) 다방을 열어 유명해졌던 여인이다.) 하지만 언니와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다. 당시 평양 권번이 기생학교를 정식으로 허가받아 학생들을 뽑고 있었는데 거기에 제1기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은 일종의 예술종합학교와도 같았다. 전통노래들인 가곡, 가사를 전공했고 가야금, 장고, 무용, 미술을 배웠다. 왕수복은 이곳에서 명창 김미라주와 이산호주, 해금 산조의 명인인 류대복, 묵죽화의 대가 김유탁을 만난다. 14세때 그녀가 수석 졸업생이 되었을 때 김미라주는 수복을 실습 보조선생으로 일하게 했다. 나이가 많아 후계가 필요했던 김미라주는 2년 정도 그녀에게 서도민요의 진수를 전해준다. 김유탁은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4군자 화가였는데 그에게서 왕수복은 대국(大菊) 그림을 배워 ‘평양기생 그림선수’ 9인에 뽑히기도 한다. 그녀는 왜 다른 꽃보다 국화를 좋아했을까. 어린 시절의 뼈저린 고난과 가난에 대한 강박이, 풍성하고 화사한 이 꽃처럼 살고싶은 마음을 낳지 않았을까. 왕수복의 경쟁력은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함으로써, 일생을 화려한 성공 무대에서 살아간 점에서도 돋보인다.
시절이 왕수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3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 사람들은 일제에 억눌린 민족감정을 전통음악으로 변용하여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른 바 신민요 바람이었다. 기생학교는 체계적으로 신민요를 가르쳤고, 왕수복은 민요 속에 꿈틀거리는 이 나라의 정한(情恨)을 절묘하게 포착해내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그때 유성기(留聲機)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레코드를 가장 많이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매일 써먹어야 하는 기생들이었다. 레코드사와 기생들은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로 만나 서로에 대한 호감을 높였다. 1933년 미국계의 콜롬비아 레코드사는 눈에 띄는 기생가수인 왕수복을 점 찍어 9곡의 노래를 취입해 음반으로 발매한다.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워낙 반응이 빠르자 평양 권번에서는 이듬해 기생 음반취입 금지령을 내놓기까지 한다. 후배 기생들이 정상적인 업무에 소홀히 하고 가수 출세에 넋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기생 가수가 뜨기 시작하자, 레코드사끼리 쟁탈전이 벌어졌다. 독일의 폴리돌사는 콜롬비아사를 제치고 왕수복을 나꿔채간다. 왕수복의 대표곡인 ‘고도의 정한’은 옮겨간 레코드사에서 빅히트를 거둔다.
잊지 못할 놀라운 행운은 1934년에 찾아왔다. 유일한 방송이었던 라디오 경성방송국은 그해 1월 JODK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하여 일본에 한국어 방송을 중계하기 시작한다. 1월8일 이 라디오를 통해 왕수복의 목소리가 일본 전역에 중계방송된다. ‘눈의 사막’ ‘고도의 정한’ ‘아리랑 조선민요’가 울려퍼지면서 열도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아리랑을 일본인들에게 불러주다니... 열 여덟 살 식민지소녀에게 민족적인 자부심을 깊이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35년 잡지<삼천리> 10월호는 레코드 취입 가수 인기투표 결선을 발표한다. 남자가수 5명과 여자가수 5명이었는데, 남자는 총 투표매수 5,888표 중에서 채규엽이 1,844표로 1등을 하고 여자는 총 투표 4,243표 중에서 왕수복이 1,903표를 얻어 1등을 한다. 그녀는 그해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득표율로서는 더욱 압도적인 1위였다. 그야 말로 10대 가수 여왕이었다. 그해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가수 투표 이야기를 했고, 왕수복의 레코드판은 불티 나게 팔렸다. 지방공연을 하고 돌아오면 팬레터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수복씨 목소리를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날 죽이지 않으려거든 한번만 만나주오.” 이런 절절한 편지들이었다. 잡지에 기사가 실리면서 왕수복이 살고 있는 집을 ‘평양부 신창리 어느 석판인쇄소 옆집’이라고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석판인쇄소 옆집 왕수복씨’라는 주소로 편지가 몰려왔고 하루에도 열 몇 명 씩, 문제의 석판인쇄소를 찾아와 이 가수가 사는 곳을 물어서 인쇄소 주인이 넌더리를 낼 정도였다.
그녀는 권번에서 레코드 취입을 말리는 터라, 기생을 접었다. 그리고 1937년엔 폴리돌 레코드 회사에서도 퇴사한다.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린 시절 풍금이 울려퍼지는 교실벽에서 느꼈던 그 선망의 공간과, 기회가 왔으나 가난 때문에 가지 못했던 공립보통학교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엔 도쿄의 음악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벨칸토성악연구원으로 옮겨 벨트라멜리 요시코 여사의 개인지도를 받는다. 당시 일본 악단에서는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38년 10월에 도쿄 조선인 자녀 단체가 개최한 공연에 참여한 왕수복은 ‘벨트라멜리의 제자’로 소개되었고, 일본의 중심에서 펼쳐진 그 무대에서 아리랑을 가곡으로 불러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제 향토에서 태어난 노래를 가지고 세계적 성악가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탈리아 말로 노래를 잘 불러도 이탈리아 사람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제 향토의 것이 아니면 생명있는 음악이 생겨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조선의 무용을 세계 무대에 소개한 최승희처럼 조선의 민요를 크게 알리고 싶습니다.”
왕수복에게는 궁박한 여건에 굴하지 않는 씩씩한 낙천성과, 재능을 향해 열정을 멈추지 않는 도도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 바닥에는, 세상에서 막 눈을 뜨자 마자 겪은 실부(失父)의 뿌리깊은 불안감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남의 집에 얹혀살며 생존 자체가 눈치꾸러기였던 그녀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남들처럼 교육받지 못하고 살았던 날들을 늘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사랑 또한 이런 무의식을 비켜갈 수는 없는 법이다.
돈 잘 벌고 인기 절정인 스타가 작가 이효석과 애틋한 눈길을 나누게 되는 것은, 그녀가 채우지 못한 부분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동했을 법 하다. 그녀 나이 24세 때인 1940년, 도쿄에서 34세 이효석을 만난다. 당시 일제는 우리 말 사용금지 정책을 시작했고, 대중가요에서도 우리 말 노래가사를 쓰지 못하게 했다. 왕수복은 가수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하면서 실의에 차 있었다. 이효석은 그해에 아내 이경원(李敬媛)과 사별하고 젖먹이 아이마저 잃은 뒤 충격으로 만주를 돌아 일본을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효석은 1934년 이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1936년에서 1940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였다. <모밀꽃 필 무렵>(1936년) <장미, 병들다>(1938)을 비롯한 대표작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향토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지닌 에로틱한 장면들이 당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효석 소설에 깊이 매료되어 있던 왕수복은 이국서 우연히 만난 작가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다.
세상 모두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빠져있던 이효석에게 왕수복은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당대의 인기가수가 아니라, 작고 가여운 문학소녀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걱정이예요. 당신과 대화할 때 나의 지식이 짧아서 혹여 답답해할까봐. 그리고 당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천하고 무식한 기생애인으로 여겨져 당신이 나를 잠시라도 부끄럽게 여길까봐서요.” 효석은 그녀에게 가만히 휘트먼의 시를 들려준다.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파도가 그대를 위해 춤추기를 거절하지 않는 동안
나뭇잎이 그대를 위해 속삭이기를 거절하지 않는 동안
내 노래도 그대를 위해 춤추고 속삭이기를 거절하지 않겠노라
왕수복은 이효석을 따라 평양으로 돌아왔다. 숭실전문학교는 38년에 폐교되었고, 그는 대동공전으로 옮겼다. 아직 아내의 상중(喪中)인지라 효석은, 왕수복과의 관계를 감추려고 했다. 언니가 하는 ‘방가로 다방’에 효석은 자주 들렀지만 서로 말없이 잠깐 응시만 하다가 돌아갈 뿐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수화기를 들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걱정했는지 아세요? 오래오래 가슴 뛰는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아요. 다방 한 켠에서 서양 고전음악에 젖어있는 모습을 본 뒤에, 잊어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당신 얼굴이 떠올랐어요. 야윈 모습, 퀭한 눈이 아프도록 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어요.”
몰래 몰래 얼굴만 보는 사이라 해도 소문은 나게 마련인가 보다. 어느 날 이효석의 제자 7명이 왕수복이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학생들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부탁입니다. 우리 교수님을 사랑하지 마세요.”
“왜요, 사랑하면 안 되나요?”
“선생님이 사모님을 잃은 뒤에 몸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폐가 좋지 않으시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까.”
“참 고마운 학생들이네요. 교수님의 건강까지 근심하시니... 하지만 교수님은 여자가 사랑해야 더 건강해지세요. 마음이 약해지고 정신이 허기지고 삶이 힘겨울수록 사랑이 필요한 거 아닐까요? 학생들 무슨 차를 드릴까요, 커피 어때요?”
학생들은 가만히 차를 마시고는 돌아갔다. 그러나 학생들의 충고가 맞았던 듯 하다. 1942년 그는 뇌막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20여일 만에 36세로 숨을 거둔다. 그의 임종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흐느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소설가 남편을 만나 소설처럼 결혼생활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꿈처럼 당신을 만나고 나는 그 꿈 속에 들어가 2년을 살았습니다. 내가 태어나 오로지 존경하고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교양과 인격을 생각한다면, 나는 감히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기도 벅찬 존재였지요. 짧았지만 나를 깊이 아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좋아하였을까요? 돌아간 아내에게서 느꼈던 모습과 향기를 나에게서 느낀 것 같다고 당신을 말씀하였지만, 그것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그러신 것일 겁니다. 그래야 내게 쉽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나를 정말 사랑하셨나요? 아내가 아닌 여인 왕수복으로 나를 예뻐했나요?”
그런데 그녀의 인생에서 사랑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1942년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전임교수인 김광진을 만나게 된다. 연인이었던 이효석은 소설가이자 정치가인 유진오와 친했는데, 유진오는 보성전문의 법학 전임교수로 있었다. 유진오와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그와 동석하게 됐다. 왕수복 나이 26세. 김광진은 당시 40세였다. 그는 평안도에 이미 아내를 두고 있었고, 당시 도도함의 대명사였던 노천명 시인과 떠들썩한 연애를 하기도 했다. 유진오는 김광진-노천명 연애사건을 소설 속에 녹여넣어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또다른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노천명은 당시 <여성>지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극예술연구회라는 연극단체에도 가입했다. 1938년 그녀는 시인 모윤숙과 함께 체호프의 작품인 ‘앵화원(櫻花園)’에 출연했다. 귀여운 딸 ‘아냐’로 열연하는 노천명을 무대 아래에서 김광진교수가 보고 반했다. 두 사람은 평양의 개운사(開運寺)에서 둘이 처음 만났고, 주위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빌어주었다. 본처와 헤어지기로 한 김광진은 노천명과 약혼을 했다. 하지만 이혼은 본처의 강력한 반대로 지연되었고 결국 약혼은 깨지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 왕수복을 만난 것이었다. 그녀의 애인 김광진이 왕수복과 만난다는 소문을 들은 ‘사슴’ 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애인을 잃은 실의와 더불어, 기생 출신에게 사랑의 성채를 양보해야 했다는 자괴감까지 겹쳐서 그녀를 방황하게 했다. 신문사를 때려 치고 해외 도피를 기도했던 노천명의 행동 속에는, 왕수복에 대한 패배의식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동시에 웃기는 참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모든 불가능한 조건들과 복잡한 상황들을 쾌도난마하고 사랑에 골인한 왕수복은 당연히 챔피언의 단맛을 누렸다. 확실히 복많은 여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펼쳐진 것은 남쪽이 아니고 북쪽에서였다. ‘왕’과 재혼한 김광진은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무임소 위원을 거쳐, 1949년 김일성대학 교원으로 임용된다. 52년에는 경제법학연구소장을 맡는다. 왕수복은 딸 김정귀와 아들 김세왕을 낳았고 전란과 이념의 소용돌이 와중에서도 비교적 평화로운 생활을 한다. 김광진은 53년 모란봉 극장에서 있었던 러시아 10월혁명 기념모임 자리에서 문화선전상 부상인 정율에게 아내 왕수복을 소개한다.
“저의 처입니다. 오랫 동안 가정생활에 파묻혀 있었는데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하네요.”
이후 수복은 중앙라디오 방송위원회 전속가수가 되어 출연한다. 1955년에 북한이 소련 파견 예술단 18명을 선발할 때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함께 뽑혀 순회공연을 나갔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 갔을 때 그녀는 ‘봄맞이 아리랑’을 불러 타슈켄트 동포들에게서 열렬한 환호를 받고 ‘조선가요의 여신’이란 호칭을 얻기도 했다. 앙코르 무대서 관객 한 명이 꽃다발을 들고 올라와 그녀 앞에 큰 절을 하며 손수건을 눈물을 닦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그녀는 이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모국어를 전혀 모르는 소련 조선족이 저토록 환호하고 박수 갈채를 보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얼이란 건 피와 함께 흐르는 모양입니다.”
왕수복은 1955년 국립교향악단 가수로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경기민요 ‘긴 아리랑’을 불렀다. 김일성은 아낌없이 박수를 치고 재청을 했다. 옆에 앉아있던 외국인들에게 “민족적 감정이 풍부해서 참 좋은 가수”라고 그녀를 설명했다. 이후 김일성은 왕수복을 거론하며 “조선사람은 조선노래를 들어야 구수하고 듣기가 좋다. 왕수복의 노래는 모두들 좋아하니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칭찬한다. 이것이 신호였는지 그녀는 당원이 되고 공훈배우로 인정받는다.
1965년 신문 가십란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북괴 고위층 부부 한쌍이 10일 판문점에 관광차 나타나 이채. 이 바람에 북괴 기자들은 애써 유엔측 기자들과 회견을 주선하기에 분주. 남자는 북괴 학습원 회원으로서 교수이며 경제학 박사로 소개된 김광진이고 북괴 기자들이 사모님이라고 소개한 여인은 공훈배우라는 왕수복. 고 이난영 여사와 동갑네 가수였다는 왕은 전옥씨 등 옛 연예 동안들의 안부를 물었으며 보전(普專, 보성전문대학) 때 10년간 경제학을 가르쳤다는 김은 유진오, 홍종인씨 등이 자기 친구라고 자랑. 시원찮은 우리 기자들의 대꾸에 회견을 주선한 북괴기자들은 두 사람 보기가 민망했던지 하나 둘 꽁무니.”
이후에도 왕수복은 북한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그녀의 환갑날 김일성은 그에게 환갑상을 차려 보내준다. 1997년 팔순에는 김정일이 생일상을 보냈다. 이해에는 독창회를 갖기도 하는데, 2대, 3대 제자들이 함께 출연해 스승과의 무대를 가졌다. 월드컵이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지나간 이듬해 2003년 86세의 왕수복은 눈을 감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다. 기생으로 출발해 성공과 사랑을 쟁취해가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 그녀는 행복했을까. 히트곡 하나를 가만히 새겨본다.
아리랑 넘는 길 몇 만리던가
가며는 오지도 못하는가요
아리랑 스리랑 마음이 변해서 소식 없나요
아리아리 얼싸 스리스리 얼싸
아리랑 고개는 님 가신 고개
왕수복 ‘봄맞이 아리랑’ 중에서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