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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고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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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에세이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술 먹은 다음날, 드디어 아수라장이 된 위장 부근을 기웃거리며 걱정하고 미안해하고 있는데, 문득 낮달같이 떠있는, 얼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오래 전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닮고싶은 사람이예요.” 우리가 흔히 하는, 좋다 싫다나 밉다 곱다가 아닌, 이런 그윽한 표현이 있었다니. 기분 좋게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닮고싶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원형(原型)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말할 때, 여기엔 꽤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우린 흔히, 아무리 화장발을 드높여도 ‘원판(原版) 불변의 법칙’이라고 말하고는 낄낄거립니다. 하지만 용모와 인상은 때에 따라 아주 많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닮은 부부'는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부부가 닮는다는 건, 서로 늘 마주 보며 살아가다 보니, 표정과 말투와 태도와 버릇이 서로에게 슬그머니 옮겨앉는다는 걸 말하겠지요. ‘나’이었던 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상대’를 내 몸 속에 들어앉히는 일, 그게 닮아가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닮고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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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고싶은 사랑에는, 사랑이 지닌 소박함이 있습니다. 사랑이 욕망으로 자라기 이전의 무욕(無慾)에 가까운 희망이 들어있습니다. 닮고싶은 마음에는, 내가 너를 어떻게 하고싶다는 게 전혀 없습니다.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만 해주면 됩니다. 당신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나를 바꿔가는 그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는 얘깁니다. 소유의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존재’를 인정하고 곁에서 지켜보며 나를 바꿔가는 사랑. 그게 닮고싶은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자주 닮고싶은 사랑은, ‘달고싶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어떤 시인은 “나는 당신의 손수건이나 브로치가 되고 싶다”고 노래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사실, “당신이 나의 손수건이나 브로치같이 내 몸에 붙일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는 마음이 함께 숨어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 장식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고약한 희망이 아니라, 사실 많은 연인들이 품고 있는 내밀한 소원입니다. 어태치먼트(attachment)에 기울어진 꿈들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모양을 한 달콤한 허영입니다. ‘달고싶은 사랑’이 자주 범하는 잘못은, 상대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 겁니다. 내 사랑이 폼이 나야 하는 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이기심에 붙여진 ‘사랑’이라는 브로치일 뿐이겠지요.


그리고 달고싶은 사랑은 자주, ‘담고싶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닮고싶은 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떨어져 있음을 깊이 인정하는 마음이고, 달고싶은 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떨어졌다 붙었다 할 수 있는 단속(斷續)의 개체임을 인정하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담고싶은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고싶은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프로그램은, 닮고싶은 사랑에서, 달고싶은 사랑으로, 다시 담고싶은 사랑으로 바뀌기 쉽도록 구성되어 있나 봅니다. 소유의 욕망이 작동하고 강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내 안에 너를 담고싶은 그 마음이야 말로, 우리가 사랑을 예찬하면서 꾹꾹 눌러온 암수한몸이 되려는 본능이 슬슬 발동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닌 듯 합니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했더라. 러브스토리는 대개 거기서 끝이 나지만 실은 그게 끝이 아닌 듯 합니다. 말하자면 ‘해피 웨딩’이 곧 ‘해피 엔딩’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다시 사랑은 시작하는 듯 합니다.
문득 상대를 ‘담아놓은 사랑’은 이제, 타자를 받아들인 에고가 그것을 힘겨워하는 양상에 이릅니다. 오랜 출렁거림과 불화 끝에, 문득 상대를 살짝 놓아주고 그저 곁에 붙어있는 포즈로 만족하는 가벼운 동행으로 바뀌고 싶어집니다. 이게 ‘달아놓은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끼리 이은 작은 끈 하나로, 서로를 신뢰하는 그런 사랑으로 진화해갑니다. 그러다 다시 시간이 지나면 그 ‘끈’마저도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지는 때가 옵니다. 부부는 그때 닮아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그와 닮아있으니 사실은 내 일부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일부 또한 나의 존재이니, 그가 무엇을 하든, 그건 일부의 내가 참여한 일이기도 하겠지요. 이 ‘닮아있는 사랑’이야 말로, 어쩌면 사랑의 일생을 설레며 앓은 뒤 이제야 돌아와 거울 앞에선 노부부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닮고싶은 사랑’이 ‘닮아있는 사랑’으로 돌아올 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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