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복면디바의 퇴장무대를 울린 '가리워진 길'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여전사 캣츠걸은 31일 MBC '복면가왕'에서 유재하의'가리워진 길'을 불렀다.
유재하는 1962년생 가수로 스물 여섯 살(1987년 11월1일)에 교통사고로 요절한 전설적인 가수다. 이승을 떠나던 그해 유재하는 1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했다.
서울음반에서 발표된 이 앨범은 '음정 불안'을 이유로 내부 심의에서 몇 차례 홍역을 겪었고, 발표된 뒤에도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후에 그의 노래는 조용필,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정수라, 나얼, 백지영, 김조한, 박정현 등 수많은 가수들이 추억처럼 불러낸 레전드급 명곡이 되었다.
한 장의 유작앨범으로 남은 유재하를 MBC 복면가왕 5연승을 기록하며 매차례 기염을 토해온 뮤지컬 디바 차지연이 호출해냈다. 잘 알려진 곡이 아니라 마치 곡명처럼 묻혀 있던 '가리워진 길'이었다.
10주를 달려온 차지연은, 복면을 쓰고 대중 앞에 서는 가수가 된 와중에 결혼식을 치렀다. 그러나 신부 차지연은 내달린 걸음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세상의 여러 가지 문턱에 걸려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이 독특한 무대에서 대중에게 자신이 지닌 가왕(歌王)의 면모를 오직 목소리와 빼어난 무대 경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매회마다 대중들의 상상을 깨는 역량으로 도전자들을 물리쳤고, 이 프로그램으로선 신기록인 5연승의 여신이 되었다. 그야 말로 '복면디바'였다.
이 꿈을 이룬 뒤, 그녀는 이제는 퇴장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뛰어난 촉수로 이미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녀의 정체와 관련된 글들이 쏟아져 올라오고 있었기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녀 스스로 고백했듯 '여전사'의 복면을 덮어쓰고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생활이,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한 신부에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음전한 새댁을 바라는 시댁 식구들을 감안한다면 전사 이미지를 벗고, 여성적인 이미지로 갈아입어야 할 필요도 생겼다.
굳이 퇴장을 염두에 두고 부른 노래는 아닐지라도, 물러나도 상관 없을 만큼 여유가 생긴 그녀가 선택한 노래가, 유재하의 가리워진 명곡이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왜 하필 이 노래를 골랐을까.
차지연. 그녀의 숨가쁜 최근의 생을 들여다 보자.2006년 뮤지컬 '라이언킹'으로 데뷔한 이래, 2014년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혁명가의 마음을 지닌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고, 작년 '드림걸즈'에서 에피 화이트의 생을 살았다. 특히 에피 화이트는 시골 출신의 억센 여가수로, '차지연은 그녀가 되기 위해 한달 만에 10kg의 체중을 불렸다. 드세고 고집 세 보이지만 그 속에 든 섬세한 영혼.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에피는 차지연 그 자신이었다. 지금은 '레베카'에서 댄버스부인이 되어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 각종 뮤지컬 시상식에서 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어 이미 그 방면에선 최고로 손꼽히는 존재가 되었다.
대개 특정한 관객들만 불러들여 그들을 향한 무대를 만들어온 그녀는, 모처럼 TV라는 대중매체로 얼굴을 가리고 어떤 편견도 없이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었던 그 자리를 통해, 음악적 재능과 인생을 못 다 꽃 피우고 떠난 '수줍어 보이는 천재' 유재하의 숨겨진 노래를 정밀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공유함으로써 그의 진가를 재발굴하려는 욕심을 지녔을 것이다. 가슴을 아리게 하고 감수성을 후벼 파는 그 노래는, 저녁답에 모여앉은 TV대중의 심장 속으로 그대로 스며 들어갔다. 그것이 비록, 그녀를 6연승 자리에 올려놓지 않아도 좋았다.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 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 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유재하가 못다한 길을. 오늘 차지연이 이어받아서 간 것일까. 그대여 길을 터주오. 그대여 힘이 돼주오. 그렇게 미성과 가성으로 뿜어내는 한 오라기 섬유같은 음정으로 그녀는 그 노래의 길을 터주었고 오래 전에 떠나간 영혼에 힘이 돼주었다. 이보다 더 뮤지컬 배우다운 일이 있을까. 에피 화이트처럼 때론 '센 여자'의 몸짓과 목청을 뿜어올렸지만, 그 속에 숨은 저 실낱같은 여린 영혼이 깊이 고뇌하고 떨며 여기까지 달려왔음을 고백하는 자리였다. 이날 새로운 복면가왕(28주만에 남성가왕이 되었다)이 된 '우리동네 음악대장'의 말은 아름다운 겸양의 멘트이기도 하지만 의미심장한 '해석'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제가 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왕님께서 제게 주신 느낌. 자리를 물려주신 것 같습니다."
차지연은 결혼 사실을 밝힌 뒤 "이 가면이 혼수였다"고 말하기도 했고, "마치 벌거벗은 느낌 같다"며 복면과 현실 사이의 숨바꼭질이 끝난 소감을 실감나게 정리하기도 했다. '캣츠' 또한 불후의 뮤지컬이니만큼 '캣츠걸'이란 가면도 우연히 씌워진 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돌아보면 그녀와 함께 했던 일요일의 기억들이, 통째로 하나의 시리즈 뮤지컬처럼 인상적인 '기승전차지연'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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