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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떻게 변해갔는가, 세기의 이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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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재-이부진, 최태원-노소영 러브스토리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사랑엔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한다. 피어날 때의 사랑은 '안아주는 사랑'이고, 서로에 대해 이해해가는 사랑은 '알아주는 사랑'이고, 고통과 위기를 만나 괴로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은 '앓아주는 사랑', 그리고 서로의 차이와 개성을 인정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놔주는 '아, 놔주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소릿값의 미묘한 차이를 활용해, 사랑이 변해가는 과정을 통찰한 우스개인데, 현실 속에서도 이 잣대는 뜻밖에, 칼과 칼집처럼 잘도 들어맞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신년 벽두, 대한민국 간판급 재벌 집안 두 곳에서 벌어진 '세기의 이혼'이 세간의 관심을 폭발시켰다. 지난해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혼외자식이 있다고 밝히고 부인 노소영(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혼하겠다는 뜻을 피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올 1월14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는 삼성가의 맞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임우재 삼성전기 상임고문과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고 친권과 양육권이 이부진에게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화제를 뿌리며 출발한 '20세기의 결혼'과, 파탄에 이른 '21세기의 이혼'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최근 술자리의 단골 메뉴가 된 두 가닥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겹쳐 읽어본다.

* 안아주는 사랑 = 1988년 최태원과 노소영은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생이었다. 1961년생,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 80학번이었던 노소영은, 쿠데타 주역이었던 아버지 노태우를 연호하며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 사이에서 도시락도 혼자 숨어서 먹어야 하는 고통스런 대학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괴수의 딸'이란 플래카드가 걸렸을 때 그는 국내에서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날아갔다. 1988년 2월25일 아버지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이 되었고, 그녀는 대통령의 딸이 되었다. 자기 정체성과 자의식에 대한 혼란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유학 생활 중의 그녀는 다부지고 씩씩했다. 유학생 최태원을 만난 건 그 전해쯤의 겨울이었다. 방학 때 기숙사 식당이 문을 닫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굶고있던 노소영은, 친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레스토랑에 나가보니 그 선배 옆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남자보다 식탁의 음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최태원의 표현을 빌리면) '토네이도처럼 반찬을 싹 쓸어' 먹어치웠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최태원의 눈엔 콩깍지가 씌어져 있었다. 170cm의 훤칠한 키에 서울대 퀸카였던 그녀의 지적인 용모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은 어떻게 변해갔는가, 세기의 이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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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이부진은 삼성복지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연세대 아동복지학과를 졸업한 전공을 살린 일터였다. 그녀는 주말마다 서울 상일동의 장애아동 보호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곳에서 다정다감한 남자를 발견했다. 삼성의 보안 계열사인 에스원 사업기획실에 근무하던 임우재였다. 단국대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한 그는 스마트하고 섬세했다. 봉사활동을 함께 하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함께 또다른 사랑을 키워갔다. 이부진이 삼성의 평사원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부모(이건희 홍나희)는 우선 깜짝 놀랐고 그 다음에는 펄쩍 뛰었다. 재벌가의 큰 딸의 결혼은 으레 정략결혼을 하던 때였다. 집안과 이해가 맞는 상대를 고르는 게 '상식'으로 통했다.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고 '신분' 또한 아주 달랐던 남자를 사위로 받아들이는 건 삼성가로서도 만만찮은 결심이었다. 이부진은 집안의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 사랑과 이 결혼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신분의 격차'를 극복한 맹렬한 사랑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로맨스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 알아주는 사랑 = 1988년 노소영이 허겁지겁 음식을 '폭풍흡입'하는 장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최태원은, 직접 요리를 해서 그녀를 기쁘게 하는 일을 즐겼다. 재벌가 아들 같지 않게 겸손하고 소박한 남자에게 노소영 또한 호감을 키웠다. "그는 과묵해보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면 밤새도록 얘기했죠. 무슨 말을 해도 잘 통하고 , 대화가 잘 됐어요." 노소영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남자이다. 노소영은 결혼 이후 조용히 내조의 길을 걸었고 1997년 시어머니 박계희(최종현 전 SK회장 부인)가 경영하던 워커힐미술관을 물려받았다. 3년 뒤인 2000년 '아트센터 나비'로 바꿔, 지금까지 운영중이다.


1998년 삼성 이부진과 결혼한 임우재는, 많은 남자들이 질투 섞인 눈으로 쳐다봤던, 최고의 '신데렐남(男)'이었다.2005년 삼성전자 미주본사 전략팀에 있었던 그는 2005년 삼성전기로 옮겼고 그곳 기획팀에서 6년만에 부사장까지 오르는, 고속승진의 주인공이 되었다. 임우재의 집안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부친이 중소기업을 운영했고 서민이 아닌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2011년 부사장 자리에 올랐을 때 재계에서는 삼성 큰 사위가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임우재의 이런 인생도약이 진행될 동안, 이들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베일에 싸여있지만, 이부진의 적극적인 성격을 감안하면 남편의 '성장'을 위한 아낌없는 내조가 있었을 것이다. 이부진은 2001년 이후 호텔신라에서 경영 감각을 키웠고 삼성에버랜드와 물산 상사무문, 제일모직을 거친 뒤 2010년부터 호텔신라 대표를 맡아 삼성 3세경영의 한 축을 세워놓았다. 부부가 다소 다른 길을 걸으며 도약을 하고 있었던 사이, 두 사람 사이를 그토록 뜨겁게 했던 사랑이 잦은 파열음과 함께 식어가고 있었다. 2014년 무렵에 파경 소문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랑은 어떻게 변해갔는가, 세기의 이혼2



* 앓아주는 사랑 = 사랑은 처음에도 앓는 것이고 끝에도 앓는 것이며 그 중간 또한 앓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위기가 찾아올 때의 '앓이'야 말로 사랑의 엄혹한 심판대라 할 수 있다. 노소영은 내조의 여왕으로 불렸다. 2003년 'SK글로벌 사태'로 남편이 수감되었을 때 그의 아내가 보여준 지극한 정성의 옥바라지는 재벌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소영은 1주일에 세 차례나 면회를 갔다. 최태원은 그런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장미꽃과 카드를 보냈다. 서로의 아픔을 읽어주고 그 아픔에 아름답게 응답했던 이 무렵만 해도, 그들 부부의 사랑은 견고해 보였다. 그런데 지난해 말 최태원이 쓴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항간의 소문대로 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저의 부족함 때문에, 저와 노소영 관장은 십년이 넘게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지내왔습니다. 종교생활 등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도 많이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더 이상의 동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재확인될 뿐,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최태원이 언급한 '십년이 넘게'라는 표현은, 2003년의 그 로맨스가 거의 끝물이었거나 둘 사이의 위기가 커지고 있던 무렵이었음을 시사한다. 노소영은 그러나 '10년 별거설'에 대해서 일축하고 남편은 2011년 9월에 집을 나갔으며 별거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5년 임우재는 갑작스럽게 삼성전기 부사장직을 내놓고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이부진이 낸 이혼청구 소송이 진행된 것과 맞물려 있는 시기다. 2014년 파경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해 연말 인사에서 임우재의 거취에 관심이 쏠렸지만, 그는 자리를 지켰다. 작년 고문직 인사가 났을 때 삼성측은 "경영 차원의 인사였으며 이혼 소송과는 별개 문제"라고 설명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임우재와 이부진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결혼도 훌쩍 넘을 수 있었던 '신분 차이'가, 이혼을 넘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파경의 이유에 흔히 따라 다니는 '성격 차이'가, 두 사람 사이에도 서성거리지만, 그 뜨겁고 강력하던 사랑이 이토록 허망하게 깨진 유리조각처럼 흩어지는 건, 사랑이 시간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일까. 지금보다 욕심이 작았고 지금보다 욕망도 작았고 지금보다 자의식도 덜했을 때엔, 오로지 상대의 매력과 장점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보다 불편함과 단점들이 너무 많이 드러났기에, 삐걱거리는 사랑의 마차를 세울 수 밖에 없었던 걸까.


* 아, 놔주는 사랑 혹은 안 놔주는 사랑 = 2015년 겨울 최태원은 혼외자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털어놓기까지 했지만, 노소영은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신학자이자 주교로 '교부(敎父)'라고 불린다)이나 성 프란시스코도 다 회심하기 전엔 엉망이었거든요.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던 거죠. 그 한 사람이 저인걸 어떻게 해요? 짜증이 나는 운명이지만..."이란 문자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혼 귀책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 현행법은 이혼 책임이 있는 최태원 회장이 이혼소송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아무리 헤어지고 싶어도, 그는 노소영의 뜻대로 그의 남편으로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1남2녀(최인근,최윤정, 최민정)가 있다.


1월 법원은 이부진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였지만, 임우재는 항소의 뜻을 밝히고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다. 신데렐남(男)의 파경은, 그를 부러워했던 뭇남자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중국의 현인, 장자는 '애유소망(愛有所亡)'을 말했다. 사랑이 시작될 때, 혹은 사랑이 불붙었을 때, 아무리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아무리 끝없는 사랑을 다짐한다 해도, '사랑은 언제나 끝이 있다'는 냉혹한 단언이다. 영원히 살지 못할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은 그저 레토릭일 뿐이며, 그 허풍이 오히려 사랑의 내실을 기하는데 방해만 할 뿐이라는 것이, 장자가 하고싶은 말일 것이다. 사랑의 뜨거움과 사랑의 외형을 자랑하지 말고, 그 사랑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완전한 유대를 느끼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재벌가의 슬픈 러브스토리 두 편이, 덧없는 사랑의 짧은 우화로 가슴을 치는 날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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