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박근혜 대통령님, 안녕하세요.
경남 통영에 살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내 나이도 한 살을 더해 98살이 됐습니다. 현재 생존한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 중 가장 많은 나이죠.
20대 초반의 나이에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한 일본인의 말에 속아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내 고향 통영으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무려 71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미 일본군의 전쟁 범죄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조국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세월을 견뎠습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위안부 피해자를 세상에 알리고 이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일본 정부의 전쟁 범죄 인정과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이행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오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일본의 극우세력도, 아베 총리도 아닌 바로 우리나라 정부, 바로 이 편지의 수신인인 박 대통령입니다. 광복 70주년의 끝자락에 정부가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내놓은 협상 결과는 우리의 요구가 쏙 빠진 '빈껍데기'였습니다.
박 대통령님. 대화가 그리도 어려운 것입니까.
이번 협상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사자인 생존 피해자와 그 어떤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채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다'고 못 박은 대목이었습니다. 한일 외무장관이 무슨 자격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 합니까? 정부가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마음대로 약속하고, 아울러 피해자와 우리 국민 나아가 국제 시민의 입을 봉하려는 위압적인 처사에 실소가 나올 지경입니다. 설령 일본 정부가 우리의 요구대로 책임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진다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결코 숨기거나 봉인될 수 없는 '역사'입니다.
결국은 돈이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 설립기금으로 10억엔(약 100억원)을 내놓기로 했다지요. 그 대가는 처절한 수준입니다. 일본 정부를 향해 후대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하라는 요구를 할 수 없게 됐고, 향후 이행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한 순간에 면책시켜 줬습니다. 재단 설립도 우리나라 정부의 몫으로 넘어왔습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모든 책임을 우리나라 정부로 환원시킨 이 굴욕적인 협상 결과에 진심으로 분노합니다.
또한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평화비(소녀상)를 우리나라 정부가 먼저 언급하며 '적절히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님. 평화비는 위안부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또 미래 세대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시민이 뜻을 모아 세운 것입니다. 정부의 소유물이 아니란 소립니다. 아무런 동의도 없이 시민의 것인 평화비를 협상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정부의 분명한 월권행위입니다.
나는 늘 말해왔습니다. '일본 정부가 사죄만 한다면 편안히 눈을 감고 훨훨 날아갈 수 있겠다'고요. 편지의 맨 처음에 말했듯이 올해로 98살을 맞았습니다.
박 대통령님께 묻고 싶습니다. 대체 언제쯤 편히 눈 감을 수 있겠습니까.
경남 통영에서 김복득 드림.
<본 기사는 지난해 12월28일 정부의 '위안부 협상 타결' 발표가 나온 직후,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최고령인 김복득(98) 할머니와 일본군위안부통영거제시민모임이 공개한 성명서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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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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