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극장가 흥행史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
추석 대목은 한국영화에게 조금 관대하다. 지난 20년 동안 열여섯 편이 극장가를 석권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개봉 시기를 눈치 보지 않는 거의 유일한 기간이다.
기현상은 1997년부터 나타났다. 이전까지 추석 극장가는 외화들이 점령했다. 1980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1984년 '지옥의 7인', 1986년 '백야', 1988년 '다이하드' 등이 서울에서만 20만 관객 이상씩을 동원했다. 흐름은 1980년대 중반에 바뀔 수 있었다. 1985년 '어우동', 1988년 '매춘' 등 소위 '야한 영화'들이 추석을 계기로 가까워지려는 연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각각 서울에서만 약 4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민족의 명절을 계속 달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바로 1970년대 후반부터 득세한 홍콩 액션물에 자리를 내줬다.
홍콩 액션물은 1990년대 후반까지 추석 극장가의 단골메뉴였다. 그 중심에는 성룡(61)이 있었다. 1979년 '취권'으로 90만 관객을 끌어 모은 여세를 몰아 적어도 두 해 걸러 한 번씩 왕좌에 올랐다. 1987년 '속 프로젝트 A', 1989년 '미라클', 1992년 '폴리스 스토리 3' 등이다. 흥행몰이는 2001년 '러시아워2', 2004년 '80일간의 세계일주', 2007년 '러시아워3' 등을 통해 2000년대 이후에도 이어졌다.
성룡의 영화에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단 카메라가 액션 장면을 롱 테이크(long-take; 하나의 숏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로 촬영한다. 그럼으로써 대역이 필요 없는 그의 스턴트 연기를 보다 실감나게 전한다. 두 번째는 영화 전반에 깔린 '코믹' 요소다. 엔딩 크레디트에 꼭 NG 장면을 삽입하는데, 액션에 실패해 몸을 다치거나 고통에 휩싸여도 특유의 웃음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에 화려한 볼거리가 더해져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을 불러들이기에 수월했다.
한국영화가 1997년부터 추석 극장가를 접수한 데는 이 두 가지 점이 주효했다. 전세를 뒤바꾼 건 멜로물인 '접속'이었지만 이후 흥행을 이어간 건 액션과 코미디 장르였다. 그 시발점은 2001년 개봉한 '조폭마누라.' 자극적인 소재와 단순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54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후 충무로는 액션과 코미디 소재를 다루는데 박차를 가했고 2002년 '가문의 영광', 2003년 '오 브라더스', 2004년 '귀신이 산다', 2005년 '가문의 위기', 2006년 '가문의 부활', 2007년 '사랑' 등을 연달아 흥행 반열에 올렸다.
이런 흐름은 이번 추석에도 이어질 수 있다. CJ E&M이 '탐정: 더 비기닝',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서부전선'을 내놓는다. 각각 추리와 전쟁을 소재로 다루지만 절반 이상을 코미디에 할애한다.
김정훈(38) 감독이 만든 '탐정: 더 비기닝'은 '춤추는 대수사선(1998)' 등 일본의 추리, 수사물을 닮았다. 관객에게 탐정이나 형사의 감정에 이입될 여지를 충분히 부여하고 무거운 사건을 빠르고 재치 넘치게 해결한다. 물론 그렇다보니 탐정물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권상우(39), 성동일(48) 등이 출연했다. 드라마 '추노(2010)'의 각본가인 천성일(44) 감독의 데뷔작 '서부전선'은 남한군과 북한군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면서 코믹 요소를 곳곳에 심었다. 두 인물에 초점이 과하게 맞춰져 흐름이 매끄럽지는 못하다. 탱크 안으로 공간이 자주 한정돼 답답한 느낌도 있다. 그렇지만 큰 욕심이나 복잡한 생각따위는 내려놓고 즐기면 그만이다. 설경구(47), 여진구(18) 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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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보다 일찍 개봉한 이준익(56) 감독의 '사도'는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개봉 7일차인 지난 22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관상(2013)' 등 최근 3년 동안 추석 극장가에 분 사극 열풍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파고드는데 주력한다. 플롯이 단조롭고 흥미를 끌 요소가 적지만 배우들의 설득력 있는 캐릭터 해석으로 위험을 빠져나온다. 송강호(48), 유아인(29) 등이 출연했다.
외화로는 예측할 수 없는 극한의 재난을 그린 '에베레스트'가 가장 돋보인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묘사에 다양한 볼거리를 겸비했다. 다만 국내에 익숙하지 않은 극한 체험이 관객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밖에도 70세 노인의 인턴생활을 다룬 '인턴', 미스터리 조직에 맞서 싸우는 러너들을 그린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 등이 추석 극장가의 복병으로 꼽히고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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