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동경한 안규철 작가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관객이 하얀 방 속으로 들어간다. 책상에 펼쳐진 원고지 위에 손 글씨로 소설을 필사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 이상의 '날개', 김승옥의 '무진기행'…. 초대된 참여자 1000명이 한 시간씩 완성한 필사본은 책으로 엮어져 인쇄된다. 그리고 이 책은 이들에게 우편으로 발송된다. 하얀 방 오른 켠엔 '기억의 벽'이 있다. 8600개의 못이 촘촘히 박힌 이 벽에는 관람객들이 단어를 써넣는 메모지가 빼곡하다. 적어야 할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고향'이 될 수도 있겠고, '아버지', '어머니', '첫사랑', '청춘'이 될 수도 있다. 이 '명사'들 역시 모아져 책이 만들어진다.
관객이 채워야할 것으로 가득한 전시가 시작됐다. 안규철(60) 작가가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마련한 대규모 설치작업 여덟 점이 전시장을 채웠다. 이번 전시는 개념적이면서도 낯설지만 재미가 쏠쏠하며, 무언가를 진득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전시 제목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시인의 시 제목에서 빌려왔다. 안 작가는 "미국에서 평생 의사로 생활한 시인은 머나먼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글로 시를 써왔다. 이분의 시가 너무 따뜻하고 아름다워 새 시집이 나오면 사보곤 했다"고 했다.
안 작가는 이어 "시인이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경의로운 일이다. 시와는 다르게 땀과 노동과 물질로 이뤄지는 '조각'을 전공한 내가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 것은 견고하고 깊이있는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일이라 믿어온 까닭"이라고 했다.
특히 이번에 나온 여덟 점 중 관객에게 필사와 메모하기로 참여를 이끄는 두 점의 작업은 작가에게 강렬했던 어떤 기억들과 연관된 것들이다. '필사'를 테마로 한 작업은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 작가는 "지방의 한 공립병원 의사였던 아버지는 어디서 빌려온 의학서적을 저녁마다 통째로 베껴 쓰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더러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세상사와 동떨어져 온전히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중요한 풍경으로 각인됐다"고 했다. 또한 8600장의 카드에 글씨가 채워지면서 벽화를 이루는 작업은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모티브를 딴 것이다. 그는 "건물과 광장을 가득채웠던 아우성과 같은 사람들의 벽보들이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며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고 우리에게 부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작업들 역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시각적으로 신선하다. 전시장 입구에선 동심원으로 만들어진 수조 연못에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수조 뒤엔 피아노 한대가 놓여 있는데 매일 연주자가 와서 '슈베르트 즉흥곡 90번'을 연주한다. 그러나 또한 매일같이 건반 하나씩을 빼가는 조율사가 있어 이 연주는 결국 침묵을 향하게 된다. '기억의 벽' 작품 주변으로는 15개 화분 모빌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바다같이 깊은 검푸른 색 벨벳 커튼으로 만들어진 64개 미로의 방으로 이뤄진 정육면체 작품이 설치됐다. 이 작품들을 지나 마지막 공간에는 직경 8미터 가까운 육중한 공 모양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무게는 35톤에 달하고 속은 온전히 텅 비어 있는데, 하얀 빛과 정적이 가득한 구조물 안에서 모든 소리가 관람객을 향해 되돌아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안 작가는 "1990년대에는 텍스트나 오브제 형식의 작품들을 해 오다 2000년대부터는 건축적인 작업, 공공미술, 관객 참여가 포함된 미술의 의미를 논하는 작업으로 확장했다"며 "이번 전시는 가장 큰 규모로 준비됐다. 관객들을 작품의 공동 창작자로 끌어들이려 했다"고 했다. 전시는 이렇듯 미술의 경계를 넘어 문학,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 그리고 출판을 포괄한다.
이번 전시는 현대자동차가 우리나라 중진작가 개인전을 10년 동안 후원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꾸려졌다. 첫 회였던 지난해 이불 작가가 선정돼 대규모 전시를 벌인바 있다. 전시는 내년 2월 14일까지.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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