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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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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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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 2002)'은 줄리언 무어(캐시 위태커 부인 역)의 저 '흐린하늘빛' 실크 스카프의 뉘앙스가 이끌어가는 내면의 흔들림같은 것이다. 실크 스카프의 '나비효과'는 그러나 정교히 설계된 비극의 유전자가 '급성장'한 결과일 뿐이다. 어느 날 바람에 저 스카프는 정원 어디론가 날아가고, 잠시 후 그것은 젊은 흑인 정원사의 손에 들려져 있다. 자주 우린 그런 영화를 보아왔지만, 사랑은 저 작은 핑계에도 수십만 볼트의 전류를 흘러보낸다. 영화를 보면서, 줄리언 무어의 저 얼굴이 내가 아는 누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영화는 나를 포함한 등장인물을 적재한 어떤 스토리들로 마구 직역(直譯)되기 시작했다. 영화는 이렇게 딴 생각을 갖게 한다.

[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1950년대 미국 코네티컷의 가을은, 엽서 속 같이 예쁜 단풍이 물들어 있고, 길마다 꾀꼬리깃 같은 금빛 낙엽들이 뒹굴고 있다. 호젓하고 깨끗한 小邑이 보이고, 파스텔톤의 古風 웨건 승용차를 따라 우린 아름다운 저택이 있는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것 만해도 웬만한 단풍 행각의 감동 뺨치는 眼福이다. 거기서 우린 부풀린 황금빛 머리와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캐시 위태커 부인을 만난다. 잡지사에서 '보통 가족 보통 주부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삶'에 대해 취재하러 나올 만큼, 완전해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다. 마을의 파티 준비로 바쁜 날들,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이들, 한 회사의 중역인 남편. 무엇 하나 '문제 없어 보이는' 그 집의 안주인인 그녀.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지나친 강조가, 뭔가 불안하고 허전하다. 신은 우리에게 늘 알맞은 문제를 내주고 평생 동안 그걸 풀게 한다.


[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문제 1번은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동성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곤 '거의' 잊어버렸다. 그런데 결혼 10년이 된 지금, 갑자기 퇴근을 하다가 한 젊고 아름다운 남자에 이끌려 그 옛날의 충동과 기분을 복각한다. 아내 캐시는 야근을 하는 남편의 사무실에 도시락을 가져다 주려고 갔다가, 남자와 키스를 하고 있는 남편을 본다. 기겁을 한다. 도시락을 떨어뜨리고 집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그녀는 이 정상적이고 완전한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남편은 상의를 한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자는 데 합의한다. 지금 같으면 우습게도 들리는 얘기지만, 1950년대는 그게 진지한 대화다. 그들은 동성애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서 '그 치욕적인 것'으로 부른다. 의사는 남편에게 '전기 치료를 시도해보자'고 말한다. 당신은 바람을 핀 게 아니라, 아픈 거라구요. 그게 그때의 인식이다. 50년이란 시간의 틈새를 마치 모르는 체 하듯 심각하게 말하는 이 진단에 영화의 맛이 있다. '우아'와 '야만'이 뒤섞인 희한한 자연스러움이다. 그래서 영화는 천연덕스럽게도, 과거 '시제'를 현재 시제로 바꿔놓는다. 어쨌거나 이 치료는 실패하고, 남편은 또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캐시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감독인 토드 헤인즈는 그 자신, 동성애를 커밍아웃한 사람으로, 퀴어시네마의 한 기수다. 그 특별한 사랑의 내면을 사회적인 '감정' 없이, 냉정하게 찍어내는 데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여기엔 50년 전 동성애에 대한 관점이 흉터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문제 2번은 흑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백인 여성의 문제이다. 지금이라면 문제도 아니지만, 영화에는 흑백을 가리고 적대시하는 사회적 공기가 꽤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이 영화는 더글라스 서커의 'That Heaven Allows'를 母本으로 한다. 같은 핏줄에는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있다. 서커의 영화에는 상류층 미망인과 젊은 정원사, 그리고 파스빈더에는 늙은 독일 여성과 젊은 아랍인 노동자가 나온다. 두 영화의 사랑은 신분 낮은 남자의 육체적 매력에 반하는 여성을 다루지만, 토드 헤인즈의 영화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사랑에 앵글을 맞춘다. 약간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춤과, 서먹한 포옹, 그리고 떠나는 열차에서의 고전적인 굿바이. 사랑은 꼭꼭 채워진 사회적 통념의 단추 속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으로 보류되고 기억의 서류철에 보관될 뿐이다. 당신은 영혼이 아름다운 남자예요. 줄리언 무어의 말은 긴 여운을 귓가에 달아준다.


[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두 문제는 결국 하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완전한 삶, 완전한 사랑, 완전한 가정이란 아주 불안한 토대 위에 있다. 영화는 거기다 동성애와 흑백 문제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오랜 갈등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지만, 사실 그런 큰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랑은 작은 균열들의 도전을 받는다. 처음엔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틈. 그러나 어느 날 그것이 큰 흉터를 드러내며 현실로 닥친다. 마치 이미 자각증세를 할 무렵이면 말기에 도달해 있는, 흉악한 질병처럼, 사랑도 그런 자잘한 내부 파열부터 시작된다는 걸 영화는 말해준다. 바로크 장식으로 가득 찬 잘 정돈된 장식장을 갖춘 그 가정은, 그러나 반드시 붕괴와 비참으로만 달려가는 건 아니다. 영화가 FIN을 올리면서 보여주는 낙천적이고 따뜻한 표정은,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하는 것임을 알려줄 뿐이지, 거기에 우려라든가 비판적인 주석을 붙이는 건 아니다. 슬픔을 담은 우아한 기록은, 어쩌면 뭔가 할 말을 남긴 채 끝나지만 우린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맡는 나프탈렌 냄새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떠나지 않는 걸 느낀다. 다시 갈아입어야 하는 삶에서 우린 잠깐 가을병같은 비감과 낯섬을 느낄 뿐이다


[빈섬의 알바시네]50. 바람 핀 게 아니라 아프다구요 영화 '파 프롬 헤븐'의 한 장면




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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