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환으로 별세
이승만정부 때부터 관료·경제단체 수장 등 거치며 근대화·성장 이끌어
[아시아경제 김혜민 기자] 우리나라 재계의 대표적인 원로로 한국 경제계의 버팀목 역할을 해 온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효성그룹 고문)이 22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1세.
1960~1970년대 한국 경제 근대화와 성장을 이끈 송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마지막 각료 12명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2012년 발간한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에서 송 명예회장을 "이 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이라고 묘사했다.
송 명예회장은 1914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오늘날의 산업은행인 조선식산은행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재무부 이재국장을 맡아 신생 정부에 발을 들였으며 1957년 부흥부(전 경제기획원) 장관과 1959년 재무부 장관 등 주요 경제부처의 수장으로 지내며 우리나라 최초의 장기 경제개발 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이는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틀이 됐다.
1957년 부흥부 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농업이 아닌 공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충주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 등이 건설됐다. 재무부 장관 자리에 오른 1959년에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흑자재정을 달성했다.
송 명예회장은 재무부 장관 시절 국내 최초로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공개 채용하는 등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제안도 많이 내놨다. 기업을 세우고 경영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연세대와 고려대에 경영학과를 신설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도 했다.
1960년 4ㆍ19혁명 후 다른 관료들과 함께 3년 간 옥살이를 한 그는 3공화국 때 다시 중용됐다. 1974년 회갑의 나이에 EC(유럽공동체) 대사로 임명됐으며 재임기간인 2년 반 동안 한국의 대(對) 유럽 수출 규모를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3배 이상 늘려 '기적의 대사'로 불리기도 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1976년 초대 수출입은행장을 맡았다.
1980~1990년대에는 기업인, 경제단체의 수장으로 재계를 이끄는 등 '재계의 신사'로 불렸다. 1980년 동양나이론 회장 취임을 시작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한국경제연구원장, 한국능률협회장, 한미(韓美) 협회장 등을 거쳤다. 2007년에는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송 명예회장은 정관계 인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뿐 아니라 남덕우 전 총리, 유창순 전 총리, 홍진기 법무부 장관과도 우정을 나눠왔다. 정관계 인사들과의 화려한 혼맥도 눈에 띤다. 슬하에 1남4녀를 둔 그는 전 상공부 장관인 이봉서 단암산업회장, 고인이 된 전 신동방 회장 신명수씨,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을 사위로 뒀다.
김혜민 기자 hmee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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