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빔 벤더스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으로 독일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1945- )가 베를린영화제 명예황금곰상을 받았다는 뉴스가 최근에 뜬 걸 봤다. 그의 작품 '비에나부스타 소셜클럽'처럼 예술가를 조명한 영화이다. 전설적인 다큐사진가 세바스치앙 가두의 스토리를 담았다고 한다.
오늘 문득 그의 2008년작 '팔레르모 슈팅(Palermo Shooting)을 본다. 오래전 '파리 텍사스(1984)'와 '베를린 천사의 시(1987)'의 감명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냉철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 헐리우드 중심의 영화 사고와 영화 언어에서 벗어나 독일인의 정체성을 찾아나섰던 이 감독이, 미국이란 무대를 벗어나 그의 고향인 독일 뒤셀도르프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던 영화이다. 뒤셀도르프는 하이네의 시와 슈만의 음악이 태어난 곳이 아닌가. 이곳에서 돈과 명성을 다 얻은 사진작가 핀 길버트(캄피노)는 그러나 성취의 정점에서 공허와 절망에 시달린다. 왜 그런가. 죽음이 드리운 삶을 무의식 속에서 깨달으면서, 내가 찍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중용(中庸)은 인간이 에고가 시킨 부당한 확신과 관성적 포즈에서 벗어나 "모르겠소"를 외치는 순간, 인간이 지닌 깊은 본성 속으로 순간이동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핀 길버트는, 중심 속의 텅빈 내면으로 나아가는 여행을 시작한 것일까. 빔 벤더스감독은 사진이 붙든 '시간'과 '풍경의 겹'과 '삶의 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이 주인공을 통해서 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잘 짜여진 스토리도 없이 무의식이 이어주는 단속(斷續)적인 신호를 따라 핀 길버트를 내보낸다.
2. 초현실주의적인 환상과 팔레르모 항구
팔레르모는 이탈리아 시칠리 섬의 항구이다. 팔레르모는 '모든 항구의 어머니'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파노르모스'에서 왔다고, 영화에서 알려준다. 항구는 배가 떠나온 고향이며 배가 다시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작가 핀 길버트는 모든 일과 명성을 내던지고 스스로 돈을 줘가며 양치기 대행 알바를 하는 한 신사의 말을 듣고, 이곳으로 떠난다.
팔레르모 슈팅은 팔레르모에서의 사진찍기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를 뒤따르며 저격하는 죽음의 신(데니스 호퍼)의 화살을 뜻하기도 하리라. 이 두 가지 일이 겹치는 점은, '모든 사진은 죽음을 붙잡은 것이다'라는 데니스 호퍼의 명제로 드러난다. 한국의 시인 박남수는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그 순수를 겨냥하지만,/매양 쏘는 것은/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읊었는데, 빔 벤더스는 이 시를 읽지 않고도 저 명제를 발견해냈단 얘기인가.
영화가 시작하면서 아파트 벽엔 살바도로 달리의 일그러진 시계가 등장하고, 달리와 루이스 브뉘엘이 함께 찍었던 실험적인 영화 '황금시대' 속의 해골 장면 비슷한 풍경도 나온다. 또 핀 길버트를 만나는 노신사가 쓰고 있는 중절모는 마르그리트의 그림 속 남자가 쓰던 것과 닮아있다. 이런 분위기를 까는 까닭은, 영화가 현실적 맥락이나 선형적인 스토리 구조를 벗고 초현실적인 진실찾기에 도전하겠다는 암시를 하고싶어서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핀은 침대 위에서 걸리버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기도 하고, 남들이 멀쩡히 걷는 계단이 옆으로 눕고 그 표지판 하나를 타고 허공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핀 길버트 역을 맡은 캄피노(Campino)는 독일에선 슈퍼스타 가수이다. 1980년대 펑크밴드를 부활시키고, 그룹 '디 토른 호젠'의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그의 가슴과 팔뚝에 새겨진 화려한 문신과 뚜렷한 윤곽을 지닌 얼굴에서 드러나는 묘한 우수는 고풍스럽고 지저분하며 기괴하면서도 누추한 팔레르모 거리의 구석들과 어우러지면서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귀에 꽂은 리시버에서 들리는 음악은 바로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렌즈가 넓은 명품카메라는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징후들을 결코 놓치지 않을 기세이다. 그러나 그가 찍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이며 드러난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 들어있는 것이기에 그의 불안과 슬픔과 고독은 늘 모호하고 불확실해보인다.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이 사진가는 그의 앵글 속에 어떻게 죽음을 담을 것인가.
3. 죽음을 찍는다
얼마전 신문편집을 하는 어느 선배의 스마트폰 속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다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손가락으로 돌려넘기는 몇 십 장의 사진이, 훌륭한 갤러리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뛰어난 작품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적인 언어들이, 감동을 깊이 각인시켰다. 아마도 빔 벤더스도 사진 자체에 관심이 많은 영화감독인듯 하다. 다큐사진작가 세바스치앙 가두를 다룬 영화도 그렇고, 팔레르모 슈팅 또한 '사진'자체에 대해 헌정한 철학적인 작품이 아닌가.
주인공 핀 길버트는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 구르스키(1955- )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구르스키는 평양의 마스게임 사진을 찍어 작품화했던 작가로, 독일뿐 아니라 세계에서 그의 사진은 비싼 것으로 명성이 높다.
그의 작품들은 유형주의 혹은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하나의 패턴 형식으로 구조화된 이미지 속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같은 일을 하는 것의 유형적 미학과 비판정신을 담는다.
핀 길버트의 작업들이 그런 것을 지향하는지는 영화로선 잘 알 수 없으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패턴'들은 살짝 구르스키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핀 길버트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에 나온 관능 여전사 배우 밀라 요보비치와도 작업을 한다. 그녀는 배가 산만한 임신모델로 등장해 핀 길버트의 앵글 앞에 선다. 그녀는 물론 영화의 주연은 아니고, 카메오 수준으로 앞부분에 살짝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사진을 찍음으로써, 핀 길버트의 특별한 여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옛 명화의 보정작업을 하는 아티스트인 플라비아(지오바나 메조기오르노)는 사진의 옛 형태인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이다. 이 분의 눈길이 워낙 매력적이어서, 영화에 몰입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녀가 몇년째 작업하고 있는 프레스코화는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네덜란드 화가인 히로니뮈스 보스(1450-1516?,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가 유명하다)의 영향을 받은 듯 해 보인다.
그 작품 속에는 화살을 맞고 죽은 당시의 유명인사들의 모습이 보이고, 얼굴이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사신(死神)과 붓을 들고 있는 작가가 들어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볼 후대의 관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핀 길버트는 그의 눈과 마주치는 일을 버거워 한다. 죽음의 신은 여자라고 말하는 플라비아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말미에 드디어 죽음의 신이 등장하여 핀 길버트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영화의 수준을 확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빔 벤더스로서는 이 스토리의 끝을 이것 외에 다른 것으로 끌어갈 대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대면만큼 인간이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리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삶의 장면들을 찍는다고 생각하는 사진작가와 죽음을 찍는다고 생각하는 사신은 같은 직업을 가진 존재라는 연상에 다다른 듯 하다. 나를 찍으라고 말하는 저승사자는, 죽음을 생 속에서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의 '사진'적인 관점이 아닐까 싶다. 감독과 관객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만난 '자아'의 정체는 썩 명쾌하지 않지만,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질문(순간순간이 죽음이 아닌가? 라는 물음)을 만나는 오딧세이인 건 확실하다. 모든 사진은 죽은 사람을 붙잡은 것이다. 이 말이 묵직하다.
4. 두 개의 카메라
영화 '팔레르모 슈팅'을 보고나면, 핀 길버트가 애지중지하며 들고 다니는 두 개의 카메라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길거리 촬영을 할 때 쓰는 렌즈가 큰 것이고, 또 하나는 무개 자동차의 앞창에 달아놓고 질주하면서 전방위로 촬영하는 멋진 카메라이다.
앞의 것은 플라우벨 마키나67이다. 플라우벨은 원래 2차대전 때 종군기자들이 전장을 누비며 쓰던 독일카메라(1912년 탄생)였는데, 일본회사가 인수해 제작하면서 '마키나'가 붙었다. 80밀리 니코르 렌즈를 쓰는 플라우벨 마키나67은 1978년에 출시된 명품카메라이다.
이 카메라는 스트루트 폴딩이라고 해서 렌즈와 본체 사이에 주름막이 있는 게 특징이다. 영화에서는 사신의 화살을 맞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는 그 비운의 카메라이다. 종군기자의 물건이었다는 점이, 빔 벤더스 감독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전장의 촬영이란 죽음을 촬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소품이지만 주인공이기도 하다. 옥션에서 중고값이 170만원대 후반이니, 그 값이 대강 짐작된다. 일본의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유시가 애용하는 기종이라고 해서 화제가 된 물건이기도 하다. 뒤의 것은 스위스의 세이츠(seitz) 제품인 '라운드샷'이다. 파노라마 촬영카메라로 영화에서 보이는 기종은 단종되었다. 자동회전되며 찍을 수 있는 제품이다. 굽이치는 터널형 도로에서 그는 이 물건을 설치하고 사진을 찍다가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차와 충돌할 뻔 했다. 순간, 360도 회전하면서 촬영된 사진에, 옆 자동차 속에 있던 죽음의 신의 얼굴이 들어있기도 했다. 죽음의 찰나마저 놓치지 않는 뛰어난 기동성을 입증한 셈이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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