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 6일 새벽 한시, 여수에서 출선한 안강망(주머니형 그물) 어선 제7태창호가 밀입국하는 중국인 60명을 옮겨 태웠다.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중국인들을 물탱크와 어구창고에 숨기고 뚜껑을 덮었는데, 창고 속에 있던 사람들 25명이 질식해 숨졌다. 이후 남은 35명을 소형 어선에 환승시키고 10월 8일 남쪽 먼바다로 가서 아침 6시에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 밀입국자들은 여수의 대경동에 발을 디뎠으나 주민의 신고로 전원 검거됐고 이어 제7태창호의 선장과 선원들도 구속됐다. 그들은 3천만원을 받기로 하고 이 일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7태창호 사건 당시 뉴스보도 정리>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일어나서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에서>
동방명주, 대륙가는 배가 반도를 떠나는구나, 샛별 하늘 저배는 황해 달빛 부서지는 바다로 나가다 멀리 인당수 처자 치마바람에 슬쩍 숨는구나, 어여 가자, 일엽편주야 반둥항구에 들어가면 낯익은 여인네들 서울 가자고 기다린다 /동방명주, 대륙가는 배가 반도를 떠나는구나 화려한 연안부두 저 배는 장산곶마루 북소리에도 깜짝 놀래여 멀리 산둥반도 수평선 파도 넘어로 슬쩍 숨는구나, 어여 가자, 일엽편주야 반둥 선착장으로 들어가면 조선말로 어딜가오, 널 기다리며 웃는구나 돈벌어서 언제 오나요, 허어 심란하게 웃는구나, 혀를 차며 서로 웃는구나 <정태춘의 노래 ‘동방명주 배를 타고’>
2014년 여름을 흔들었던 한국영화 4대천왕, 명량 해적 군도 해무. 그 중에서 앞의 세 영화는 사극(史劇)이지만, 해무는 이름과 분위기가 비슷해보여도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다. 김민정씨 원작의 연극으로 이미 성공을 거뒀던 작품으로, ‘살인의 추억’을 함께 했던 봉준호와 심성보 감독이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맨앞에 정리해놓은 제7태창호 사건을 바탕으로 했기에 박진하는 현실감이 있었다. 2001년은 한국이 1997년 시작된 IMF구제금융으로부터 겨우 벗어나던 해였다.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폐선 위기에 시달려온 한 선장(船長)이 내지른 한탕 꿈. 그것이 뿜어올린 한 바탕의 바다안개(海霧)가 영화의 음울한 모노톤을 이룬다.
작가 김민정은 무진기행의 저 안개나루 풍경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바다에서 벌어진 황당하고 끔찍한 참사를 적군같은 안개가 감싸고, 그 속에 고립된 사람들이,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들러붙는 여귀(女鬼)와도 같은 사나운 농무가 뿜어내놓은 입김에 슬슬 미쳐가는 내면풍경을 그려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저 해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해무가 지배하는 인간의 광기의 흐름을 찍어내기에는, 밀도(密度)를 구축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순애보도 찍어야 하고 배 위의 이순신같은 카리스마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내게 이 영화는 강렬한 인상과 함께, 한국과 중국 사이에 오가는 ‘황해’의 긴박한 서사를 또한번 변주한 수작(秀作)으로 읽혔다. 전체적인 인상이 그렇다는 얘기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에 출연했던 연변 사내 면정학을 연기한 김윤석이 해무의 선장역을 맡아서였을까. 역시 그의 포스는 강렬했다. 도끼로 사람을 퍽퍽 찍는 비정한 에너지는 흡사해서 자꾸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많은 주검을 실은 배 위에서, 닥쳐드는 농무에 슬슬 미쳐가는 한 사내의 내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김윤석은 갑작스럽게 둔갑한 비정한 살귀(殺鬼)처럼 보였고, 막판에 배를 지키기 위해 무모한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다소 맥빠지고 한심해보이기도 했다.
2002년에 내놓은 정태춘 박은옥의 10집 앨범에 실린 ‘동방명주 배를 타고’는, 2001년 태창호 스토리로 대변되는 중국인들의 밀입국 뉴스들이, 올로케인 듯 생생하게 노래로 삽입된 느낌을 준다. 한국에 돈을 벌러 숨어들어오고 돈을 벌어 숨어들어가는 황해의 숨찬 풍경들이 디테일까지 살아있는 노래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홍매(한예리)나 숨진 율녀(조경숙)는 모두 인천항 밀입국을 포기하고 저 여수까지 흘러내려가서 한국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연변족 여인들이다. 한국은 그들에게 인생대박과 역전이 있는 기회의 땅이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불법의 회로(回路)였다.
영화가 안개와 광기의 뚜렷한 함수를 포기하면서도, 견고히 지키고자 했던 것은 동식의 홍매에 대한 불꽃같은 사랑이다. 배를 옮겨타는 과정에서 홍매가 바다에 빠지고 그녀를 구하고자 뛰어든 청년은 곧 사랑의 맹렬한 투사로 변한다. 이와 거의 동시에 바다 한 복판에서 여자의 냄새를 맡은 선원들이 급속히 저질스럽게 탐욕스러워지는 것도 스토리의 비극을 키우는 에너지이다. 감독은 이 장치가 갈등과 감동의 지점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식의 헌신은 생뚱맞은 느낌이 있었고 참극의 메들리 속에서 동식에게 몸을 허락한 홍매의 감정에 대해선 거의 힌트가 없었다. 사랑의 명쾌한 접점이 없이 끊임없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면서, 일련의 사건들의 동인(動因)을 제공한 그녀는 그저 공포영화의 주인공일 뿐이었다. (동식의 사랑은, 목숨걸고 탈출한 바닷가에서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졌고, 6년 뒤 아이 둘을 낳은 엄마가 되어 나타난다.)
해무(海霧)의 너울대는 흐름을 탄 사람은 기관장 완호(문성근) 아재였다. 그는 밀입국자들의 떼죽음에 대해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반응한 사람이다. 물론 그 정신적인 충격은 광증(狂症)으로 나타났다. 그가 이 배에서 일어난 비밀을 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 선장 철주는 그를 죽인다. 그 다음에 등장한 또다른 발설 가능자는 기관실에 숨어있던 홍매였다. 선장은 홍매를 죽이려 하고, 동식은 선장이 완호 아재를 죽인 일을 들먹이며 선장의 행동을 제지하려 한다. 이런 갈등 속에서 홍매를 겁탈하려 하는 사내들과, 동식의 좌충우돌이, 일대 아수라장을 만든다. 하지만 그들에게 안개는 그저 병풍처럼 풍경을 이룬 보조재이며 미쳐가는 그들을 둘러써서 지켜보는 관객일 뿐이었다.
영화에서 부각하고자 했던 주제 중의 하나는 뱃사람 특유의 고집과 배에 대한 애착같은 것이었다. 선장은 동식에게 그것으로 설득했고(그 계집이 무어냐, 우린 전진호에서 한 배를 탄 사람들이 아니냐), 선원들이 그 시신들에게 도끼와 칼을 찍어댄 까닭은 배 위에서의 선장명령은 법이요 양심 그 자체라는 논리였다. 철주가 죽어가면서도 닻을 내려 배의 무게를 줄이려 했던 것도, 목숨보다 중요한 배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아마도 원작에선 의미가 돋을새겨졌을 수도 있는, 선원들의 억세고 굳센 가치관이, 영화에선 감동도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해무’는 2001년 제7태창호 위로 2014년 관객들을 몰아넣은 공로가 있다. 당신같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일련의 황당한 사건들이 얽히고 꼬이면서 지옥을 만들어간 선상(船上)에 서 있게 했다. 저마다 자기의 욕망과 가치와 기준으로 격렬히 움직이는 캐릭터들의 실감연기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숨가쁘게 몰입하게 만들었음도 고백해야겠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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