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빅인터뷰-한국경제日本化되나]③진념 전 경제부총리
한국 경제가 일본화(日本化) 공포에 빠졌다. 불임(不姙)의 경제, 영구적인 불경기(secular stagnation)라고도 부른다. 일본화란 버블 붕괴 이후의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저성장·고령화가 동반돼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불황과 비슷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경제주체들은 줄어든 일자리와 턱밑까지 차오른 빚 부담 탓에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다. 경기회복기 때 늘 나타났던 주택건설 붐도 기대할 수 없다. 잠재성장률은 떨어지고 청·장년 생산가능인구는 사라진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커진다. 경제 전반에 수요와 공급이 떨어져 기업도산과 실업이 늘고, 이는 수요를 더욱 위축시켜 물가하락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일본은 이렇게 '잃어버린 20년'을 겪었지만, 이런 현상이 우리경제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적색경보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이에 맞춰 아시아경제신문은 경제학자들을 만나 '한국경제 일본화되나'를 주제로 재패나이제이션(Japanization)의 현실과 문제, 대안 등을 엮은 신년 빅인터뷰 연재시리즈를 싣는다.<편집자주>
[신년빅인터뷰-한국경제日本化되나]①조순 "일본化? 우린 지금 日보다 더 나쁜 상황"
[신년빅인터뷰-한국경제日本化되나]②박승 "초이는 체감경기와 진짜 민생경기를 헷갈려한다"
구조개혁 정책동력 강한 초기에 밀어붙였어야…
집권 3년차에 해내려면 필사적인 집중 필요
경제문제 what 보다 How 중요...中·日보다 강한 ICT산업 키워야
정책동력 한정돼 있는데 다 하려고 하면 이도저도 안돼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장관만 다섯번 했다. 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정부 등에서 정권의 이데올리기와 관계없이 내각에 발탁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기아차 문제의 해결사로 그를 택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환란 위기 당시 국가 재정을 책임질 기획예산위원장으로 그를 투입했다. '특급 구원투수'란 별명도 이때 붙었다. 한국경제의 위기 때마다 경제사령탑으로 나서 난국을 돌파하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관료 40년 여정을 마치고 퇴임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경제의 해법을 그에게 묻는 사람이 적지않다. 진념(75)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다.
지난 16일 동대문구 홍릉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그를 만났다. "늙은이한테 뭐 물어볼게 있다고…"며 말을 아꼈지만 현안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송곳처럼 폐부를 찌르는 답변을 내놨다. 현안의 맥을 정확하게 짚었고 한국사회에 대한 걱정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는 세 가지를 강조했다. 우선 '경제 문제에는 여야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민주화ㆍ다기화된 사회일수록 각 주체들이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차이는 크지만 반대편을 적대시하기 보다 타협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함께가는 개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곧 '국가리더'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라고 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 인력 활용 문제는 물론이고 이민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동북아 경제 삼국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강한 ICT(정보통신기술)산업에서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기에 대응하지 못하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보다 더 심각한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놓쳐버린 구조개혁 골든타임 사즉생(死卽生) 각오 해야 = 진 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구조개혁의 골든타임을 이미 놓쳤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 인수위원회 6개월동안 강하게 밀어부쳐야 할 정책을 집권 2년이지난 시점에 뒤늦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선거가 없는 올해가 '골든타임'이라고 하는데 이미 골든타임은 지나갔어요. 인수위 6개월, 정책동력이 가장 강할 때 내놔야 할 어려운 정책들이 이제서야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보면 지금이 사실상 마지막기회입니다. 결연한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구조개혁의 성공요건을 묻자 "어려운 문제..."라며 무엇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책 동력은 제한돼 있는데 한꺼번에 실행하려고 해서는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번 구조개혁의 총론은 방향이 잘 잡혀있습니다. 하지만 노동개혁부터 공공개혁까지 이것저것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정책을 끌고가는 힘은 한정돼 있어 전부다 한번에 해낼 수 없어요. 정책의 우선순위를 잘 살펴서 중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슬기롭게 해나가야 합니다."
진 전 부총리는 특히 우선시돼야 할 개혁 과제로 저출산ㆍ고령화 문제를 꼽았다. 하지만 지지부진한 단계라고 평했다. "정부가 직접 저출산ㆍ고령화 사회위원회 만들어놓고 한번도 위원회 소집을 안했어요. 우리나라 출산율이 일본을 밑돌기 시작했고 고령화속도도 빠른데도 이렇습니다. 추가적인 노동력 확보는 치밀한 정책대책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인구문제와 관련해선 개척자(프론티어) 정신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민에 대해 보다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통일문제도 프론티어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성공단을 수십개 만들어 노동력 활용에 나서야 합니다. 북한 인프라를 업그레이드하는 건 우리에게 프론티어 정신을 가져오게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개발되지 않는 자원들이 많은데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해나가야 합니다."
그는 지금의 저성장은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외환위기 때야 내부개혁을 통해 빨리 회복이 됐지만 지금은 잘 안되죠. 수출과 내수의 불균형도 같은 문제입니다. 내수를 올리려면 소비와 투자가 살아야 하는데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지 않고, 가계도 소비를 늘리려해도 일자리가 줄고 임금소득이 움직이지 않다보니 여력이 생기지 않죠. 이 때문에 큰 틀에서 정부의 구조개혁 성공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한 겁니다."
◆동북아 경제 삼국지…우위 선점해야 = 진 전 부총리는 한국경제가 일본의 반격과 중국의 추격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를 동북아 경제 삼국지(三國志)에 빗댔다. "지금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이죠. 중국의 알리바바 샤오미부터 인도시장까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추격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반도체며 핵심부품 기술을 가르쳐준 일본도 한국을 뛰어넘어 반격하려고 하고 있죠. 특히 일본 보수층에서 그런 성향이 강합니다. 이대로 두다가 중국이 우리경제를 추월하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저성장ㆍ저금리의 일본식 장기 저성장 시대로 간다면 일본보다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장기불황에 들어가기전에 산업, 원천 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지금 제일 잘하고 있는 모바일 폰을 보면 핵심부품은 일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본은 연금이며 사회복지가 다 잘 돼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개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우리경제에 큰 파국이 올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것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한국은행이 3.4% 성장과 1.9% 물가상승률을 예견했는데 이 정도로 저성장 디플레이션이 왔다고 보긴 어렵지만 미래산업투자를 게을리 하면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일본보다 우리가 앞서 있는 것으로는 정치적인 에너지와 역동성을 꼽았다. "일본 아베노믹스는 일본 정치의 불안정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총리가 거의 1년마다 한번씩 바뀌다보니 국가에너지를 함께 모으는게 잘 안됐죠.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여건은 더 좋은 겁니다." 바로 말을 이었다. "일본보다 모험적이고 진취적이라는 걸 잘 활용해야합니다. 1999∼2000년에 한국과 일본이 문화예술 분야를 트자고 할 때도 우리가 문화적으로 예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지만 케이팝(K-POP)이 앞장섰어요. 우리 국민과 젊은이들 역동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상대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강한 ICT 산업에서 우리 경제의 성장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경제문제에 여야 없다', 민주화 다기화된 사회일수록 타협 중요 = '경제문제에 여ㆍ야는 없다' 진 전 경제부총리의 지론이다. 표심을 잡으려고 여야간 싸움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설득과 타협을 해서 한 방향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돼야 구조개혁 역시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개혁이 아니라 함께가는 개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같은 맥락에서 "무엇(What)보다 어떻게(How)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때에 따라선 정부가 개입해야 할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도 분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부가 할일은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정부 내에 한류세계화나 여성골퍼양성 추진위원회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나라 한류나 골프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정부는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다만 국민의 안전이나 보육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내수와 일자리, 저출산을 한번에 묶을 수 있는 정책대안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예를 들어 국공립 어린이집을 여러개 만들어 일자리도 창출하고, 출산과 보육의 사회화 기능도 키우고 내수도 일으킬 수 있죠. 이런 정책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진 전 부총리는 인터뷰 말미에 "사회가 민주화 다기화되고 있다. 상황에 걸맞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정책 전달체계(policy delivery)라고 이름 붙였는데, 정책을 세울 때부터 국민에게 이를 어떻게 알리고 소통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정책 네이밍 정책 마케팅도 중요하죠. 의료민영화나 공기업개혁 등도 상황의 본질보다는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책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이름을 제대로 붙인다면 정책 비용이 줄고, 보다 효율적으로 정책의 취지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1962년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중에 행정고시(14회)에 합격해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경제기획원의 물가정책국장, 차관보를 지냈고 노태우정부 시절인 1991년 동력자원부 장관, 김영삼정부 때인 1995년 노동부 장관, 김대중정부 때에는 1999년 기획예산처 장관에 이어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과 2001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맡았다. '직업이 장관', '특급 구원투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한국 경제관료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1940년 전북 부안 출생
▲1959년 서울대 경제학과
▲1983년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
▲1988년 제 7대 해운항만청장
▲1990년 제 35대 재무부 차관
▲1991년 제 11대 동력자원부 장관
▲1995년 제 13대 노동부 장관
▲1997년 기아그룹 회장
▲2000년 제4대 재정경제부 장관
▲2001년 제9대 국민의 정부 부총리
▲2013년 전북대 석좌교수
▲2013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연구위원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