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빅인터뷰-한국경제日本化되나]①조순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경제가 일본화(日本化) 공포에 빠졌다. 불임(不姙)의 경제, 영구적인 불경기(secular stagnation)라고도 부른다. 일본화란 버블 붕괴 이후의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저성장·고령화가 동반돼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불황과 비슷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경제주체들은 줄어든 일자리와 턱밑까지 차오른 빚 부담 탓에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다. 경기회복기 때 늘 나타났던 주택건설 붐도 기대할 수 없다. 잠재성장률은 떨어지고 청·장년 생산가능인구는 사라진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커진다. 경제 전반에 수요와 공급이 떨어져 기업도산과 실업이 늘고, 이는 수요를 더욱 위축시켜 물가하락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일본은 이렇게 '잃어버린 20년'을 겪었지만, 이런 현상이 우리경제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적색경보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이에 맞춰 아시아경제신문은 경제학자들을 만나 '한국경제 일본화되나'를 주제로 재패나이제이션(Japanization)의 현실과 문제, 대안 등을 엮은 신년빅인터뷰 연재시리즈를 싣는다.<편집자주>
그 나라는 20년 버틸 기초체력 돼 있었지만…한국은 견디기 어려울 것
남북환경 달라 통일대박론은 의문…금리 추가인하 안돼 가계빚 너무 위험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우리가 일본과 같은 어려움을 20년이나 견딜 수 있을까요. 난 어렵다고 봐요. 일본식 장기불황은 우리나라에게 훨씬 더 치명적으로 올 수 있습니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원로 경제학자는 흰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한국 경제학계의 산맥 조순(87) 서울대 명예교수. 그는 일본식 장기침체가 우리나라에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장률ㆍ실업률ㆍ물가와 같은 '숫자'가 아직 괜찮다고 안심해선 안된다고도 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A4용지 두쪽에 빼곡하게 적어둔 자필메모와 옥편을 꺼냈다. 조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19일 서울 관악구 행운동 자택에서 1시간동안 진행됐다.
◆한국경제 日本化 우려 크다…차근차근 대비해야
조 교수는 한국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의 파고를 겪은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한국은 장기불황에 더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성장ㆍ저금리ㆍ저물가ㆍ저투자ㆍ저임금ㆍ고부채, 한국도 이런 일본식 장기불황 문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봐야겠죠. 이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 세계가 조금씩 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일본은 20년을 잃었지만, 20년을 버틸 만큼 기초가 튼튼했단 말이죠. 이를테면 기술수준이라든지 내수시장이라든지 국민의 생활태도랄지가요. 거기에 비해 우리는 상당히 그 기초가 약합니다. 일본식 장기불황이 닥쳤을 때 우리 국민은 견디기가 더 어려울 겁니다."
그는 1998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지금 우리 경제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우려했다. '저성장'이라는 뉴노멀시대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탈출구가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팔방이 막혀있는 기분입니다. 이리로 가도 안되겠고 저리가도 안되겠고, 재벌은 재벌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어렵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경제를 끌어오던 대기업의 순이익이 쪼그라들다보니 투자와 고용이 감소하고 내수 불황까지 오면서 한국경제가 대불황을 겪고 있다고 했다. 특히 저임금과 가계부채, 저출산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조 교수가 내놓는 해법은 명료했다. "우리가 해야 하는데 아직 하지 않은 게 많아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말을 이어갔다. "아주 간단해요. 중소기업과 내수산업을 키워야 합니다. 대외의존도도 줄여야 하구요. 그런데 이게 엄청난 노력이 들죠. 오랫동안 버릇이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창조경제를 해석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면서 "우리가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숙제인데, 아직 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 문제들을 먼저 풀어야 경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도 빨리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민이나 통일과 같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정책보다는 사회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취업을 하기가 어렵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교육비가 너무 많죠. 결국 자녀를 둘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이런 부분은 기성세대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해결을 해줘야합니다."
다만, 아베노믹스식 금융완화 정책은 저성장경제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정권을 유지하는 것과 경제를 잘 운용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아베노믹스에 대한 그의 평가다. 아베 정권은 선거에선 이겼지만 길게 볼 때 경제정책이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분석이다. "구조개혁이 잘되지 않는 상태에서 양적완화로 돈을 살포한다고 경제가 살아남긴 어렵죠. 환율로 일본 수출을 돕는 건 단기적인 거고 그걸로 일본경제가 크게 나아지리라 보진 않아요. 일본은 대내의존적인 경제구조기 때문에 더더욱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겁니다."
◆최경환노믹스 인플레시대 옛 정책…통일대박론 신중히 접근해야
이 때문에 최경환노믹스에 대한 그의 평가는 단호하다.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고 재정확장을 해서 경기가 좋아진다는 건 '인플레시대의 현상'이라고 했다. "아직도 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옛날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지금 뉴노멀, 즉 저성장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여전히 옛날식 정책을 해선 안되죠." 이 때문에 올해 중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시장의 압박에 대해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이기에 지금 상황에선 더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경고다. 그는 특히 은행이 기업에 대출을 덜하고,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건 금융 전반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정권의 '통일대박론'에 대해선 신중한 견해를 전했다. "통일에 대해선 한국 사람으로서 물론 찬성합니다. 하지만 '대박'이란 표현에는 의문이 듭니다. 북한사람과 우리는 노동환경이 많이 다르죠. 인구의 반이 늘어나니까 경제에 도움이 된다? 너무 쉬운 생각입니다.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미리미리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서독이 동독한테 하듯이요. 사람이란 건 감정과 자존감(프라이드)의 동물이죠. 이를 잘 이해하고 통일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한ㆍ중ㆍ일 경제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본래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하는 것은 '이웃나라들끼리 해야 하는 겁니다. 경제구조나 인종도 비슷하죠. 남미 저 멀리 있는 나라와 해봐야 큰 이익도 없죠. 한중일이 한다면 좋습니다."
◆숫자 뒤 민생 고통을 봐야...경제수장들 임기 넘어 길게 보는 정책 절실
조순 교수가 인터뷰 내내 입에 올린 이야기는 '숫자의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실물경제가 실제 성장률, 실업률이 보여주는 숫자보다 나쁘면 숫자보다 실제 민생경제의 고통을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KDI가 올해 성장률을 3.5%를 전망했죠. 숫자는 그만하면 괜찮습니다. 실업률을 봐도 숫자론 뭐 아직 괜찮죠. 핵심은 지금 그 숫자가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경제, 고통, 민생의 어려움을 반영을 못한다는 겁니다. 숫자는 알아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경제를 평가할 수 없어요." 조 명예교수는 고용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실업률의 숫자가 달라질 수 있는 예를 빗댔다. 같은맥락에서 경제수장들이 숫자만 믿고 안일하게 실물경제를 판단해선 안된다고도 했다.
그는 국가의 리더라고 하면 반드시 경제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건 미리 대처를 해야하는 문제인데, 국민은 아직 이 문제는 모르니 설득하고 알리고 동의를 구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지도자의 비전이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2년은 '노력은 했지만 비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이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뭔지 나도 모르겠고 국민들도 잘 모르고 있죠. 비전을 모르니 전략도 없고, 전략이 없으니 정책도 왔다갔다해요. 이 나라는 혼자의 나라가 아니죠. 내 나라도 아니고 국민과 자손들의 나라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내 임기동안 큰 난리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 나중에 올 문제에 대해 미리 대처를 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죠. 뒤에 오는 사람도 앞에서 그런 결정을 한 것에 대해 이해를 해주고 '전후'가 맞아야 정책이 잘 굴러갑니다. 내 임기 이후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정책을 펼쳐야 할 때 입니다." 조 교수는 경제상황과 정책 모두가 답답한 듯 인터뷰 내내 환한 미소를 짓지 못했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경제의 산증인이다.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 초대 민선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 민주 국민당 대표 등 정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20년간 재직하면서는 한국 경제학계의 기틀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직한 성품과 확고한 원칙주의자로서 '서울 포청천', '산신령' 등이 그의 별명이다.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49년 서울대 상대졸업
▲67년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박사
▲68년 서울대 상대 부교수
▲70~88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88~90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92~93년 한국은행 총재
▲95년 서울시장(초대 민선)
▲97~98년 한나라당 총재
▲98~2000년 15대 국회의원
▲2002년∼현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바른경제동인회 회장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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