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빅인터뷰-한국경제日本化되나]②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한국 경제가 일본화(日本化) 공포에 빠졌다. 불임(不姙)의 경제, 영구적인 불경기(secular stagnation)라고도 부른다. 일본화란 버블 붕괴 이후의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저성장·고령화가 동반돼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불황과 비슷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경제주체들은 줄어든 일자리와 턱밑까지 차오른 빚 부담 탓에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다. 경기회복기 때 늘 나타났던 주택건설 붐도 기대할 수 없다. 잠재성장률은 떨어지고 청·장년 생산가능인구는 사라진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커진다. 경제 전반에 수요와 공급이 떨어져 기업도산과 실업이 늘고, 이는 수요를 더욱 위축시켜 물가하락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일본은 이렇게 '잃어버린 20년'을 겪었지만, 이런 현상이 우리경제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적색경보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이에 맞춰 아시아경제신문은 경제학자들을 만나 '한국경제 일본화되나'를 주제로 재패나이제이션(Japanization)의 현실과 문제, 대안 등을 엮은 신년 빅인터뷰 연재시리즈를 싣는다.<편집자주>
장기불황해법 돈 푸는 게 아니라 구조개혁…금리인하론 일본식 자산거품붕괴 우려
가계소비 늘려야 잠재성장도 늘어나…민간소비 확대 위해 소득재분배 나서야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기준금리를 연 0.25%포인트 내린다고 중국으로 갈 투자가 한국으로 오겠습니까? 안 와요. 투자나 소비로는 안 가고 먹을 것이 있는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으로 가서 자산가격을 올립니다. 금리가 싸니까 가계부채도 늘어나죠. 일시적으로 경기 훈풍이 불 순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작용만 커집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79)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초이노믹스가 나가야 할 방향을 묻는 질문에는 "빗나갔다"며 역정을 냈다. 더 이상의 금리 인하로는 일본식 장기불황에 대응하기 힘들다고 힘줘 말했다. 자산 가격만 올려 일본식 거품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의 문제들을 짚어내는 목소리에는 결기가 여전했다. 질문에 답할 때마다 조목조목 숫자로 근거를 댔다. 박 전 총재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진행됐다.
◆통화·재정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구조개혁 집중해야= 박 전 총재는 금리인하로 불어난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늘어난 돈이 투자 소비, 예금으론 안 가고 자산시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동산에 좋은 목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그리로 가고 삼성SDS나 제일모직 공모주가 있다고 하면 수십조 원이 몰려들어요. 이자는 싸니까 가계부채는 천정부지로 오르죠.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유동성의 현주소입니다. 돈을 풀어낸 상황이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저금리가 빚어낸 비정상이죠."
그는 경제수장들이 지금의 경기침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 잠재성장률이 3%대 중반 올해 성장률 전망치가 3%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입니다. 숫자만 보면 지금 성장률은 잠재성장보다 높은 거예요. 그럼 이게 저성장에서 오는 경기침체일까요. 아니에요, 민생경기 침체입니다. 국민생활이 성장률과 관계없이 나쁘다는 거죠. 결국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쓴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대책은 '성장의 과실을 가계로 잘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빚내서 소비하게 하는 초이노믹스에 대해 박 전 총재는 "번지수가 다르다"고 했다. 반짝 소비와 투자를 늘려 '체감'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어도 '민생'경기를 개선할 순 없다는 얘기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성장률이 8%면 기업소득 성장률과 가계소득 성장률도 똑같이 8%였습니다. 선순환경제죠. 양극화란 말도 없었고 가계소비침체란 단어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성장률이 4%면 기업소득은 16% 늘고 대기업소득은 25% 이상 성장합니다. 가계소비는 고작 1~2% 성장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변수가 가계부채에요. 이제 초이노믹스는 소득재분배정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대기업에 쌓여있는 돈을 가계로 환류시키는 거예요. 가계 빚을 줄여주는 겁니다. 옛날처럼 경제성장률과 기업소득 가계소득 성장률이 같아질 수 있도록요."
◆일본처럼 자산가격 거품붕괴 올 수 있다= 박 전 총재는 장기불황을 통화와 재정정책으로 대응해서는 일본처럼 '자산가격 상승→거품붕괴→장기침체'로 이어지는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은 호황을 누리다가 1985년에 선진국과 같이 '플라자합의'를 했어요. 일본 엔화를 절상하기로 했습니다. 1985년 당시 엔화는 달러당 280엔에서 4년 뒤 128엔으로 올랐습니다. 수출길이 막히고 일본경제가 심각한 침체 국면을 맞았죠. 이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의 아베노믹스 식 경기부양책이 나왔습니다. 국채발행을 해서 대규모 재정팽창을 유도하고 제로금리로 통화팽창도 했죠. 오늘과 똑같은 정책입니다. 한마디로 돈 푸는 걸 1987년부터 1990년까지 3년 동안 했죠. 그 결과 일본 부동산이 2~3배 오르고 주가도 3~4배 폭등했습니다. 경기는 달아올랐죠. 그렇지만 소비와 투자는 영향이 없었어요.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하죠. 자산가격만 급등하고 실물경제의 변수인 소비 투자는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1991년에 거품이 터진 겁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집값도 떨어져 자산시장이 붕괴됐습니다. 이게 지금 일본 장기불황의 시발점이 됐어요. 지금 아베노믹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마이너스성장에 마이너스물가와 장기침체를 겪다가 결정적인 극약을 내놨는데 마땅히 이런 정책은 과거와 똑같이 주식시장 달아오르게 하고 부동산 방긋하고, 환율도 올립니다. 가격변수를 자극해 시장에 훈풍을 몰고 올 순 있어요. 국민들의 체감경기도 많이 좋아질 수 있죠. 당장 환호성을 치고 정치적으로는 아베도 지지를 받습니다. 하지만 성장률은 마이너스죠. 장기불황 탈출에도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결국 장기불황 문제의 정답은 돈을 푸는 게 아니라 경제구조개혁이겠죠. 한국도 거울삼아야 해요."
◆성장 과실 나눠야 산다…증세부터 시작해야= 박 전 총재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부분은 '민간소비'다. 투자와 수출주도의 정책보다 민간소비를 활성화하는 해법이 지금 우리나라 경제 단계에선 중요하다는 것이다. "선진국이 되면 경제는 소비가 주도하게 됩니다. 투자나 수출은 거의 한계죠. 우리도 지금 그 단계에 와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는 이제 투자나 수출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소비가 결정하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계소비를 늘려야 잠재성장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비증가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매년 밑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증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존 20%인 담세율을 우선 23%로 올려 모은 100조원의 자금으로 양극화 문제도 해결하고 정부가 공약한 사회복지정책도 추진할 수 있다는 게 박 전 총재의 주장이다.
그는 "이게 가능하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은데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일단 세금이 너무 낮아요. 정부는 법인세 올리면 투자가 안 된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미국과 일본 법인세율이 35%고 중국도 25%에요. 우리나라는 22%고 실효세율은 그나마 15%밖에 안 됩니다. 파격적으로 낮은 세금이에요. 과거에는 투자를 위해서 법인세를 낮춰줬지만 돈을 쌓아두고 투자를 안 하는 오늘날에는 올릴 여지가 있습니다."
정부에 쌓인 빚을 갚기 위해서도 증세논의가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부채가 급증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걸 차단하기 위해선 증세가 필요해요. 일본의 경험을 보면 약 20년 전에는 정부부채가 200조엔 밖에 되지 않았어요. 20년 뒤인 지금은 1200조엔으로 여섯 배가 불어난 겁니다. 불과 2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죠. 20년 전에는 한국보다 더 건전했어요. 이대로 방치하면 한국이 일본처럼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본화 우려되지만 디플레이션 걱정단계 아니야…다만 저출산 대책 내놔야= 박 전 총재는 우리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경제는 3%대 성장과 1~2%대 저물가의 장기저성장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습니다. 경제성장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김대중 정부 5%, 노무현 정부 4.3%, 이명박 정부 때는 3.3%입니다. 앞으로도 더 내려갈 것으로 봅니다. 우리경제에 당면한 문제는 '성장의 조로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선진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조로현상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구조개혁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고 했다. 박 전 총재는 특히 저출산대책과 소득재분배, 가계소비, 노사분규, 사교육비, 고주택가격 문제 등을 꼽았다.
디플레이션 우려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마이너스물가를 겪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물가 수준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평생 동안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왔어요. 우리가 지향했던 목표는 현재의 물가수준입니다. 이걸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왔던 거예요. 그런 면에선 1~2%대 물가는 환영할 일입니다. 유가가 반등하면 다시 올라갈 수 있어요. 물가에 대한 부담은 마이너스물가로 떨어진 일본이 해야 할 일이지 우리가 지금 당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박 전 총재는 저출산 노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민이나 통일보다는 '보육과 교육의 사회화'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출산한 젊은 부부들에게 혜택을 주고 보육과 교육을 사회화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최선의 대안은 남북통일이나 남북 경제협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북한 방방곡곡에 개성공단을 만들고 인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죠. 이민은 또 하나의 방법이지만 유럽의 사례를 보면 부작용이 상당히 큽니다. 상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겠죠. 이 때문에 지금으로선 제3의 방법인 보육과 교육의 사회화를 통한 정책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경제학 교수부터 대통령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까지 두루 지낸 한국 경제계의 거목이다. 건설부장관 시절 분당 일산 등 5개 신도시를 입안했다. 총재 때는 금융통화위원회의 독립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을 받는다. 마음이 물질보다 더 중요하다는 '선심후물(先心後物)'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1954년 이리공업중고등학교 졸업
▲1961년 서울대 상대 졸업·한국은행 입행
▲1974년 뉴욕주립대학교 경제학 석사 및 박사
▲1976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6년 금융통화위원
▲1988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1988~89년 건설부 장관
▲1993~96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1997년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2006년 한국은행 총재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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