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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노장청(老壯靑) 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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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노장청(老壯靑) 운동'이 필요하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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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TV에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방영하는 것을 적잖게 술이 취한 정신에도 졸음을 참아내면서 봤다. 이미 서너 번째 보는 것이지만 내게 이 영화는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하다.


그리고 아릿했다.

그 아릿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청춘은 언제나 순수하고 싱그럽지만 순수하기에 슬픔을 담고 있다는 것을, 젊음이 지나가면서 나의 어딘가 깊은 곳에 묻어뒀던 그 슬픔을 영화가 꺼냈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을 보여줬던 천재 감독 하길종의 요절이 애석함을 자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암울한 세상에서 입과 귀를 닫고 바보가 돼야 했던 주인공들의 방황과 좌절, 주인공 영철이 자전거를 타고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비극이 단지 옛날 풍경이 아니라 지금 우리 청년들의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장발단속을 피해 육교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야 하는 일은 없지만, 딛고 설 땅을 잃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지금의 젊은이들의 현실이 그때와 다를 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청춘에의 예찬이 아닌 위로와 동정을 받는 이들이다. 청년들은 지금 비명을 내지르고 신음을 내뱉고 있다. 우리는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이들의 우울한 초상을 보고 있다. 우리는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벌을 받고 있는 이들의 절규를 듣는다.


요컨대 지금 대한민국은 청년에게 희망이 아닌 절망이다. 이 땅에서 청년은 더 이상 '청년'일 수 없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주역이 돼야 할 땅에서 '유배'당하고 있다.


청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이 과연 청춘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허용된 젊음이며 삶인가?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 외침에 대답해야 한다.


이 땅의 청년은 대한민국의 모든 모순과 파행의 피해를 '대속(代贖)'하고 있다. 돈만 벌면 좋다는 황금만능의 천민 자본주의,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 살아남고 이긴다는 무한경쟁, 동료에게, 친구에게 '야수'가 되라고 떠밀리며, 살아남는 게 무조건 선(善)이라는 노골적인 선동에 휘둘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방황할 자유, 질풍노도의 특권은 없다. 지금 이 땅의 청년들은 청년이되 청년이 아니다. 자신 속의 '청년'을 거세당하고 있다. 아니 스스로 자신의 '청년'을 거세하고 있다.


누가 이들을 구원할 것인가. 다른 누구도 구원해줄 수 없다. 아니 구원할 의지가 없다. 결국 자신을 구할 이들은 청년 자신들에게 있다, 는 것을 이제 청년들은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청년운동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답은 결국 자신들 안에 있음을 자각한 청년들의 발돋음이다.


지난주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의 지인들과 저녁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제 우리 나이든 세대들은 청년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한다"고. 옳다. 청년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직도 차지하고 있는 중년들은 이제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퇴장'이어선 안 된다. 그보다는 청년운동과 함께 중년운동이, 장년운동이, 노년운동이, 즉 '노장청(老壯靑) 운동'이 필요하다. 장년다운 장년, 중년다운 중년, 노년다운 노년이 돼야 하는 것이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라며 자신의 몸을 내줬던 노신의 말처럼 이제 선배로서의 소명을 다할 때다. 아니 뜻이 있고 열정이 있는 이라면 나이가 얼마이든 모두가 청년이다. 모두가 청년이 될 때 청년들을 일어서게 해줄 수 있다. 어제의 청춘들이 오늘의 청춘들과 함께할 때, '바보들의 행진' 속 어제의 청춘들이 지금의 청년들과 함께 다시 청년이 될 때, 청년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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