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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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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짧은 도련님'콤플렉스 딛고 매派로

[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오른쪽)의 52세 생일을 축하하는 어린시절 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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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일본 관방부장관이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자민당 간사장 대리의 자격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의 북한행에 동행한다.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던 당시 북일 정상회담에서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일본인 납북 사실을 부정해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공작원이 13명을 납치해 8명이 죽고 5명이 살아 있다"고 밝힌 것이다. 협상 당시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초강수를 제안했다. 북한이 사과를 하지 않으면 방북의 목적이었던 북일 공동성명 없이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아베의 강경책을 받아들여 북한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같은 강수는 의외의 성과를 내 김 위원장의 사과를 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외교적 성과로 아베는 일본 국민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이익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내는 이미지는 아베가 총리로 발돋움하는 데 가장 큰 자산 역할을 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치사에서 새로운 기록 몇 가지를 갖고 있다. 전후 취임한 총리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2006년 당시 52세)에 총리가 됐을 뿐 아니라 1948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 이후 처음으로 총리에서 물러난 뒤 다시 총리가 된 정치이력을 가지고 있다. 요시다 전 총리의 경우 전후 혼란기 속에서 정권을 잠시 내려놨다 다시 총리가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7년 사임했다 2012년 오뚝이처럼 화려하게 복귀한 아베의 삶은 여느 정치인의 삶과 다르다. 이 같은 기록들은 '매파', '강경보수' 등으로 주변국들로부터 비판받는 아베 총리가 정작 일본인들로부터는 큰 기대를 얻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종종 스스로를 '싸우는 정치인'으로 소개한다. 일본과 일본국민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혀가 짧고 말이 빨라 연설에 어려움이 많은 데다 스트레스에도 약해 자주 배앓이를 하는 등 대중정치인으로서 약점이 많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언제든 싸우겠다"는 전의를 밝히며 오늘날 일본을 이끌고 있다. 정치인 아베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거리 유세 나선 정치인 아베.

◆정치명문가의 도련님= 아베 총리의 집안은 지역구를 아들 또는 사위에게 물려주는 것이 일상화된 일본에서도 독보적인 정치 명문가로 꼽힌다. 전후 일본 정치ㆍ경제의 초석을 세운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는 그의 외할아버지다.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전후 최장수 총리이기도 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외종조부(사토 전 총리는 기시 전 총리의 친동생이다)다. 친가쪽도 만만치 않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역시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외무상 등에 올랐으며 차기 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베가 태어나기 한참 전, 젊은 나이로 요절한 친할아버지 아베 간(安倍寬)은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베 총리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도쿄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아베 간은 진보적 정치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주도해 A급 전범으로 처형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 맞섰던 평화주의자였다. 반면 외할아버지인 기시 전 총리는 관료로 출발해 도죠의 전시 내각에 참여해 A급 전범으로 처형될 뻔 했던 인물로, 전후에는 보수성향의 자민당을 창당하는 등 일본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힌다. 아베 간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남에 따라 아베 신타로는 장인인 기시의 보살핌 속에서 정치인이 됐다. 할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베 신조도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비서로 정치 입문=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태어난 아베는 어린 시절부터 도쿄에서 자랐다. 세이케이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아베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하다 중도에 그만두고 고베제강소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2년간 일한 뒤 아버지 외무장관을 지냈던 아버지의 비서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자녀를 비서관으로 채용해 정치세습 준비를 하는데, 아베 총리 역시 같은 경로를 밟았다. 아베는 비서관으로 있는 동안 비서 업무를 맡기보다는 주변 보좌진 등을 통해 정무감각 등을 익히는 데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1991년 아베 신타로가 사망한 뒤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공식적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치입문 초기에는 '옷 잘 입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채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베가 전국구 스타로 부상한 것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 해결 노력 덕분이다. 그는 일본내 강경 입장을 주도하면서 일본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베는 1997년 요코다 메구미(田めぐみ) 가족을 중심으로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가 만들어지자 동료 의원들과 함께 '북한 납치의혹 일본인 구조 의원연맹'을 결성하며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일 정상회담 뒤, 북한은 귀환을 전제로 생존자 5명의 일본 방문을 허락했다. 이들이 일본에 돌아오자 일본사회에서는 다시 이들을 북한에 돌려보낼 지를 두고서 새로운 논란이 벌어졌다. 북일관계를 생각해 돌려보내야 한다는 입장과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맞선 것이다. 아베는 이 때에도 고이즈미 총리에게 5명을 돌려보내지 말 것을 촉구했다. 만약 북한이 반발한다면 경제제재 등으로 맞서자고 설득한 것이다. 이번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아베의 제안을 받아들여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고 일본에 잔류시켰다. 납북자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아베는 스타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떡볶이 코트 입고(오른쪽) 포즈 취하는 청년 아베

◆성공과 몰락, 그리고 재기= 2006년 아베를 총리로 만든 데에는 북한의 역할이 컸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계속되자 일본인들의 안보 불안은 커졌다. 대북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아베의 인기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해 9월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의 후계자가 돼 자민당 총재를 거쳐 총리에 오른다.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아베 정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007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당이 연금 기록의 부실 관리를 문제삼기 시작한 이후 2007년 5월 납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후생연금과 국민연금이 5095만건에 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이어 현역 농림수산부 장관이었던 마쓰오카 도시카쓰(松岡利勝)가 금전 스캔들로 자살했다. 6월에는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장관이 "(2차 대전중)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의 발언을 해 새로운 파문을 일으켰다. 발언의 책임을 지고 규마 방위장관은 사임했지만 내각 지지율을 뚝 떨어졌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뒤, 마쓰오카의 후임인 아카기 노리히코(赤城德彦) 농수산상마저 스캔들로 사임했다. 뒤이어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연장안이 야당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자 아베 총리는 정국 운영능력을 상실했다. 급기야 궤양성 대장염으로 건강까지 악화된 그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총리에서 물러났다. 취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못한 때였다.


아베는 2012년 11월 총선에서 자민당을 대승으로 이끈 뒤 총리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잊혀질 뻔한 그를 구한 것은 이번에도 주변국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중국과 일본 간의 영토 갈등이 이어지면서 일본 내에서 '싸우는 정치인' 아베를 찾는 목소리가 커졌다. 아베가 이전 선거에서는 안보 관련 이슈만으로 인기몰이를 했다면, 이번에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까지 일본인들에게 먹혔다. 선거 결과, 자민당이 중의원 480석 가운데 294석, 우익신당 일본유신회가 54석을 차지하는 등 보수세력의 압승이었다. 반면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은 57석에 불과한 수준으로 무너졌다. 아베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반동의 자식' 멍에를 명예로 만든 오뚝이

[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아버지 시중쉰(오른쪽)과 포즈를 취한 어린 시절의 시진핑(왼쪽)

# 1969년 봄. 16살이 채 되지 않은 시진핑(習近平)을 태운 기차가 중국 베이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옛이름)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에 '핑(平)'자를 단 시진핑은 꿈에 그리던 그의 고향 베이징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금의환향(錦衣還鄕)도 의금지영(衣錦之榮)도 아니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생활환경,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지쳐 산시성(陝西省) 옌촨현(延川縣) 량자허촌(梁家河村)을 도망쳐나온 그였다.


당시 시진핑은 '반동의 자식'이었다. 젊은 나이에 중국 부총리에 올랐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정치적 모함을 받고 수감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시진핑은 수용소에 갇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상산샤샹(上山下鄕)'을 선택해야만 했다. 상산샤샹은 마어쩌둥이 문화대혁명 때 "지식청년은 농촌에 내려가 내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주도한 운동이다. 살기 위해 농촌으로 내려갔지만 고위층 자제로 부족한 것 없어 자라온 어린 시진핑에게 벼룩이 득실거리는 토굴에서 생활해야 했던 량자허촌의 생활은 암울하기만 했다. 그해 1월에 상산샤샹을 떠나는 지식청년 전용기차를 탔으니 3개월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한 시진핑은 "지금은 군중에 의지해야 한다"는 친지들의 설득으로 다시 량자허촌으로 되돌아갔다. 가족의 품을 그리워했던 소년 시진핑은 량자허촌에서 7년간 지내며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100kg에 달하는 보리가마니를 들고 산길을 뛰어 다닐 수 있었고, 어려움에 처한 마을 주민들을 상담해주는 자상함까지 갖췄다. 시진핑은 뒷날 "량자허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부인과 함께한 시진핑(오른쪽)

◆'반동의 자식'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시진핑은 '반동의 자식'이라는 굴레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번번히 거절당하면서도 공산당의 인재 양성을 위한 청년조직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가입을 위해 끊임없이 신청서를 냈다. 여덟 번 만에 공청단 입단 승인을 받은 그는 공산당 입당에도 성공했다. 이어 지역 생산대의 책임자인 서기에 임명됐다. 이 지역에 상산샤샹으로 내려온 청년 가운데 첫 사례였다. 농민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내려간 지식청년이 주민을 이끄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지역민들의 인심을 얻은 시진핑은 그들의 추천으로 1975년 칭화대학교 청강생 자격을 얻었다. 그가 량자허촌을 떠날 때 마을 주민 10여명은 60리길을 배웅 나와 여관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정치적 멍에를 안고 떠났던 시진핑은 오뚝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 베이징에 돌아온 것이다.


시진핑은 칭화대에서 화학공정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아버지인 시중쉰은 정치적으로 복권되는 동시에 중국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한다. 시진핑에게도 서광이 비췄다.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1979년 겅뱌오(耿飇) 당시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가 됐다. 당시 부총리를 겸직하고 있었던 겅뱌오는 군의 일상적 업무 등을 담당하는 실세였다. 군부 핵심의 측근으로 발탁된 것은 아버지 등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겅뱌오를 수행하면서 군 관련 경험을 쌓았다. 시진핑의 당시 군 경험은 이후 차기 국가 최고지도자까지 올라가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공산당 총서기를 두고 시진핑과 경쟁을 벌였던 인사 가운데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1982년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을 한다. 군문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겅뱌오의 제안을 뿌리치고 지방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중국 군부의 높은 위상과 승승장구하던 시중쉰의 영향력, 고위층 자제들이 중앙에 남으려 했던 점 등을 고려했을 때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시진핑의 이같은 결정은 당시 기준에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지만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인재 육성과정으로 자리잡게 된다. 실력 있는 인재들을 지방에 보내 현장경험을 쌓게 하고, 능력을 검증해 고위직으로 발탁하는 것이다.


허베이(河北)성 스좌광(石家莊)시 정딩(正定)현 위원회 부서기를 맡게 된 시진핑은 척박한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다 중국의 고전 '홍루몽' 드라마 세트장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관광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구상이었다. 시진핑은 집요하게 방송국 제작진 등을 설득해 베이징에서 6시간이나 떨어진 정딩현에 촬영장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정딩현은 수십년간 관광특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시진핑은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시로 옮긴다. 이어 푸저우(福州)시 서기를 맡은 뒤, 푸젠성 당위원회 부서기를 거쳐 성장에까지 오른다. 텐안문(天安門) 사태 등의 혼란기 속에서 시진핑은 정치적 신중함을 유지하면서 반부패 활동, 경제 개발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16차 당대회를 앞두고 중국 경제 성장의 거점 중 한 곳이었던 저장(浙江)성위원회 부서기에 임명됐다. 그후 불과 40일만에 저장성 서기였던 장더장(張德江)이 광동성 당서기로 옮기게 되면서 시진핑은 저장성 당서기로 승진하게 된다. 중국에서도 부유하기로 손꼽히는 지역의 지도자가 되면서 시진핑은 랴오닝성(遼寧省) 서기 리커창(李克强), 장쑤성(江蘇省)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상무부장 보시라이(薄熙來) 등과 함께 차세대 중국 지도자로 떠올랐다. 저장성에 있는 동안 시진핑은 전시성 사업보다는 경제 발전의 틀을 이룰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또한 초고속경제 성장의 이면에 숨겨진 부패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아베vs시진핑]③'매派-오뚝이' 같은 듯 다른 개인史 시진핑의 젊은 시절

◆베이징의 주인이 되다= 2006년 중국에서는 정치권을 뒤흔든 격변이 일어난다. 상하이시(上海市) 당서기 천량위(陳良宇)가 부패 혐의로 실각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최고위급에 해당하는 정치국원이 갑작스레 부패 문제에 걸려 무너진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천량위는 중국 공산당 최대 파벌 가운데 하나인 상하이방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그의 실각은 단순한 고위공직자의 부패 사건이 아닌 계파간의 투쟁의 성격을 나타냈다. 천량위의 후임을 두고서도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이 대결 양상을 보였다. 힘 겨루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두 계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진핑이 발탁된 것이다.


시진핑에게 불어온 훈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천량위 사건 뒷처리와 상하이 도처에 뿌리박은 부패문제 척결에 힘을 쏟은 시진핑은 7개월 뒤인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로운 파란을 일으켰다. 2008년 3월 중국 공산당 최고위직인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꿰찼다. 당시 시진핑은 잘해야 정치국 상무위원보다 서열이 낮은 정치국원 정도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됐다. 더욱이 시진핑은 서열 8위로 차기 국가지도자로 유력했던 리커창(李克强, 서열 9위)을 제쳤다. 서열 1위부터 7위까지는 정년 규정에 따라 5년 뒤 퇴임이 확정된 상황이라 사실상 시진핑이 중국의 차기 10년(2012년~2022년)을 책임지는 권력자로 등장했다.


시진핑이 최고지도자로 뽑힌 배경에는 중국 권력지형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후진타오 전 주석이 권력을 잡은 이후 공청단이 세를 확장한 가운데 상하이방이 여기에 맞서면서 양대 계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진핑이 대안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누구도 시진핑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시진핑의 뛰어난 대인관계와 세련된 정치감각, 혁명 원로의 아들이라는 점 등이 그에게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시진핑의 청렴성도 크게 작용했다. 시진핑은 연안지역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도 부패의 유혹을 뿌리치고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았다. 정딩현 시절 낡은 군복에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시진핑의 검소한 모습은 정치적으로 성장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상하이시 서기 취임 당시에는 호화스러운 서기 관저를 공산당 원로를 위한 양로원으로 바꿨으며, 시에서 제공하는 고급관용차나 특별열차 이용을 거절했다. 이런 모습은 검소함을 극히 강조했던 그의 아버지 시중쉰을 닮았다.


시진핑의 폭넓은 인간관계도 성공의 배경이 됐다. 태자당 출신으로 중국 고위층과 인적 관계를 가졌던 것은 물론 상산샤상 시절부터 이후 정치적으로 성장하며 만나왔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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