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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시진핑 열전]시진핑, '반동의 자식' 멍에를 명예로 만든 오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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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격동 한국외교의 Key-man 아베 & 시진핑] 시진핑이 살아온 길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 1969년 봄. 16살이 채 되지 않은 시진핑(習近平)을 태운 기차가 중국 베이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옛이름)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에 '핑(平)'자를 단 시진핑은 꿈에 그리던 그의 고향 베이징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금의환향(錦衣還鄕)도 의금지영(衣錦之榮)도 아니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생활환경,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지쳐 산시성(陝西省) 옌촨현(延川縣) 량자허촌(梁家河村)을 도망쳐나온 그였다.


[아베-시진핑 열전]시진핑, '반동의 자식' 멍에를 명예로 만든 오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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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진핑은 '반동의 자식'이었다. 젊은 나이에 중국 부총리에 올랐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정치적 모함을 받고 수감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시진핑은 수용소에 갇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상산샤샹(上山下鄕)'을 선택해야만 했다. 상산샤샹은 마어쩌둥이 문화대혁명 때 "지식청년은 농촌에 내려가 내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주도한 운동이다. 살기 위해 농촌으로 내려갔지만 고위층 자제로 부족한 것 없어 자라온 어린 시진핑에게 벼룩이 득실거리는 토굴에서 생활해야 했던 량자허촌의 생활은 암울하기만 했다. 그해 1월에 상산샤샹을 떠나는 지식청년 전용기차를 탔으니 3개월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한 시진핑은 "지금은 군중에 의지해야 한다"는 친지들의 설득으로 다시 량자허촌으로 되돌아갔다. 가족의 품을 그리워했던 소년 시진핑은 량자허촌에서 7년간 지내며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100kg에 달하는 보리가마니를 들고 산길을 뛰어 다닐 수 있었고, 어려움에 처한 마을 주민들을 상담해주는 자상함까지 갖췄다. 시진핑은 뒷날 "량자허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아베-시진핑 열전]시진핑, '반동의 자식' 멍에를 명예로 만든 오뚝이 아버지 시중쉰(오른쪽)과 포즈를 취한 어린 시절의 시진핑(왼쪽)

◆'반동의 자식'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시진핑은 '반동의 자식'이라는 굴레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번번히 거절당하면서도 공산당의 인재 양성을 위한 청년조직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가입을 위해 끊임없이 신청서를 냈다. 여덟 번 만에 공청단 입단 승인을 받은 그는 공산당 입당에도 성공했다. 이어 지역 생산대의 책임자인 서기에 임명됐다. 이 지역에 상산샤샹으로 내려온 청년 가운데 첫 사례였다. 농민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내려간 지식청년이 주민을 이끄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지역민들의 인심을 얻은 시진핑은 그들의 추천으로 1975년 칭화대학교 청강생 자격을 얻었다. 그가 량자허촌을 떠날 때 마을 주민 10여명은 60리길을 배웅 나와 여관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정치적 멍에를 안고 떠났던 시진핑은 오뚝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 베이징에 돌아온 것이다.


시진핑은 칭화대에서 화학공정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아버지인 시중쉰은 정치적으로 복권되는 동시에 중국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한다. 시진핑에게도 서광이 비췄다.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1979년 겅뱌오(耿飇) 당시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가 됐다. 당시 부총리를 겸직하고 있었던 겅뱌오는 군의 일상적 업무 등을 담당하는 실세였다. 군부 핵심의 측근으로 발탁된 것은 아버지 등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베-시진핑 열전]시진핑, '반동의 자식' 멍에를 명예로 만든 오뚝이 시진핑의 젊은 시절


시진핑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겅뱌오를 수행하면서 군 관련 경험을 쌓았다. 시진핑의 당시 군 경험은 이후 차기 국가 최고지도자까지 올라가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공산당 총서기를 두고 시진핑과 경쟁을 벌였던 인사 가운데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1982년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을 한다. 군문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겅뱌오의 제안을 뿌리치고 지방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중국 군부의 높은 위상과 승승장구하던 시중쉰의 영향력, 고위층 자제들이 중앙에 남으려 했던 점 등을 고려했을 때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시진핑의 이같은 결정은 당시 기준에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지만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인재 육성과정으로 자리잡게 된다. 실력 있는 인재들을 지방에 보내 현장경험을 쌓게 하고, 능력을 검증해 고위직으로 발탁하는 것이다.


허베이(河北)성 스좌광(石家莊)시 정딩(正定)현 위원회 부서기를 맡게 된 시진핑은 척박한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다 중국의 고전 '홍루몽' 드라마 세트장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관광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구상이었다. 시진핑은 집요하게 방송국 제작진 등을 설득해 베이징에서 6시간이나 떨어진 정딩현에 촬영장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정딩현은 수십년간 관광특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시진핑은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시로 옮긴다. 이어 푸저우(福州)시 서기를 맡은 뒤, 푸젠성 당위원회 부서기를 거쳐 성장에까지 오른다. 텐안문(天安門) 사태 등의 혼란기 속에서 시진핑은 정치적 신중함을 유지하면서 반부패 활동, 경제 개발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16차 당대회를 앞두고 중국 경제 성장의 거점 중 한 곳이었던 저장(浙江)성위원회 부서기에 임명됐다. 그후 불과 40일만에 저장성 서기였던 장더장(張德江)이 광동성 당서기로 옮기게 되면서 시진핑은 저장성 당서기로 승진하게 된다. 중국에서도 부유하기로 손꼽히는 지역의 지도자가 되면서 시진핑은 랴오닝성(遼寧省) 서기 리커창(李克强), 장쑤성(江蘇省)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상무부장 보시라이(薄熙來) 등과 함께 차세대 중국 지도자로 떠올랐다. 저장성에 있는 동안 시진핑은 전시성 사업보다는 경제 발전의 틀을 이룰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또한 초고속경제 성장의 이면에 숨겨진 부패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아베-시진핑 열전]시진핑, '반동의 자식' 멍에를 명예로 만든 오뚝이 부인과 함께한 시진핑(오른쪽)


◆베이징의 주인이 되다= 2006년 중국에서는 정치권을 뒤흔든 격변이 일어난다. 상하이시(上海市) 당서기 천량위(陳良宇)가 부패 혐의로 실각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최고위급에 해당하는 정치국원이 갑작스레 부패 문제에 걸려 무너진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천량위는 중국 공산당 최대 파벌 가운데 하나인 상하이방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그의 실각은 단순한 고위공직자의 부패 사건이 아닌 계파간의 투쟁의 성격을 나타냈다. 천량위의 후임을 두고서도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이 대결 양상을 보였다. 힘 겨루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두 계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진핑이 발탁된 것이다.


시진핑에게 불어온 훈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천량위 사건 뒷처리와 상하이 도처에 뿌리박은 부패문제 척결에 힘을 쏟은 시진핑은 7개월 뒤인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로운 파란을 일으켰다. 2008년 3월 중국 공산당 최고위직인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꿰찼다. 당시 시진핑은 잘해야 정치국 상무위원보다 서열이 낮은 정치국원 정도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됐다. 더욱이 시진핑은 서열 8위로 차기 국가지도자로 유력했던 리커창(李克强, 서열 9위)을 제쳤다. 서열 1위부터 7위까지는 정년 규정에 따라 5년 뒤 퇴임이 확정된 상황이라 사실상 시진핑이 중국의 차기 10년(2012년~2022년)을 책임지는 권력자로 등장했다.


시진핑이 최고지도자로 뽑힌 배경에는 중국 권력지형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후진타오 전 주석이 권력을 잡은 이후 공청단이 세를 확장한 가운데 상하이방이 여기에 맞서면서 양대 계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진핑이 대안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누구도 시진핑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시진핑의 뛰어난 대인관계와 세련된 정치감각, 혁명 원로의 아들이라는 점 등이 그에게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시진핑의 청렴성도 크게 작용했다. 시진핑은 연안지역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도 부패의 유혹을 뿌리치고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았다. 정딩현 시절 낡은 군복에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시진핑의 검소한 모습은 정치적으로 성장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상하이시 서기 취임 당시에는 호화스러운 서기 관저를 공산당 원로를 위한 양로원으로 바꿨으며, 시에서 제공하는 고급관용차나 특별열차 이용을 거절했다. 이런 모습은 검소함을 극히 강조했던 그의 아버지 시중쉰을 닮았다.


시진핑의 폭넓은 인간관계도 성공의 배경이 됐다. 태자당 출신으로 중국 고위층과 인적 관계를 가졌던 것은 물론 상산샤상 시절부터 이후 정치적으로 성장하며 만나왔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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