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격동 한국외교의 Key-man 아베 & 시진핑] 그들의 정치 DNA 핏속의 롤모델을 분석한다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 1960년 여름, 다섯 살의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외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한창 재롱을 부리며 놀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수많은 시위대가 언제라도 쳐들어올 듯이 집을 둘러싼 채 '안보(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어린 아베는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시위대의 구호가 재미있는 듯 "안보 반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시위대 흉내를 못 내게 막으려 했지만, 기시는 아베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시위대의 주장이 왜 잘못됐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외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아베 신조는 이제는 반대로 "안보 찬성"을 외쳤다.
아베 총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다. 아베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였던 인물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당시 일본 총리였다. 아베는 2006년 쓴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책에서 "외할아버지는 일본의 미래만을 생각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아베의 아버지 역시 정치인으로 외무상까지 올랐던 인물이지만 아베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장 닮고 싶은 롤모델로 외할아버지인 기시를 꼽았다. 기시의 꿈을 아베가 잇고 있는 것이다.
◆제국의 관료 출신인 외조부= 기시는 1898년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현은 근대 일본을 탄생시킨 메이지유신의 주체세력이었던 옛 조슈번(長州藩)의 현재 지명이다. 조슈번 출신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는 일본 첫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육군 원수이자 총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있다. 야마구치현은 역대 일본 총리 57명 가운데 8명의 총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조슈번 출신이 근대 일본 정계와 육군을 주름잡았다는 점에서 기시는 태생적으로 일본 사회의 주류였다고 볼 수 있다.
기시는 원래 사토(佐藤)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또한 사토 노부스케였지만 기시가 어렸을 때 친척집안인 기시 가문의 양자로 입양됨에 따라 기시 성(姓)을 쓰게 됐다. 이 때문에 훗날 일본 총리에 올라 노벨 평화상 등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성이 달랐다. 아베의 친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 외무차관도 어렸을 때 기시 가문으로 입양돼 아베와 다른 성을 쓰고 있다.
몸이 약했던 기시는 군인의 길 대신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1917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기시는 1920년 수석으로 졸업한 뒤 농상무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능력있던 관료였던 기시는 1930년 독일에 파견돼 산업합리화운동 등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가 타격을 받자 그는 자신이 연구한 산업합리화정책을 주도적으로 정책에 반영했다. 그는 국민경제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민간자본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기시는 만주사변 이후 탄생한 일본의 위성국 '만주국'의 산업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간다.
기시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차관)과 총무청 차장을 겸직하며 만주국 산업정책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다. 당시 만주국은 만주인이 명목 뿐인 장관을 맡고 실질적으로는 일본인 차관들이 주요 문제를 모두 결정했다. 사실상 만주 전체의 산업정책을 기시가 총괄한 것이다. 그는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과 함께 만주국의 생산력 확충을 위한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생산력 확충에 나섰다. 기시는 민간 자본가의 자본을 만주국으로 들어오게 한 뒤 이들 기업이 독점적 특수회사를 세워 특수ㆍ준특수회사 등 생산회사를 만드는 방식의 산업정책을 펼쳤다. 전후 일본의 경제개발을 이끈 관료 주도형 경제개발 정책은 만주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주국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기시는 상공성 차관으로 임명돼 일본에 복귀한다. 1942년 기시는 현직 상공상의 신분으로 총선거에 출마해 최고 득표를 얻으며 당선돼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공성은 군수성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는 군수성 차관이 되어 총리와 군수상을 겸직하고 있는 도죠 히데키(東條英機)를 도와 전시 경제를 운영했다.
◆'55년 체제'의 주역= 전쟁 패배로 일본이 미군의 점령을 받게 되자 기시는 1급 전범으로 기소돼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도죠 히데키 등 A급 7명이 처형됐지만 그는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고 3년만에 출소했다.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각료로 전쟁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니라 사이판 함락 직후 도죠 내각에 맞선 경험 등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관료로서의 재능 덕분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을 벌이게 되자 일본을 대소련 방파제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시와 같은 능력있는 관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기시는 이같은 사실을 수년 전에 감옥에서 예측했다. 그의 옥중일기에 따르면 기시는 석방 2년 전인 1946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일본에 기회가 생길 것이고, 자신도 교수형을 당하지 않고 걸어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기시는 그러면서 '반공 친미'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가 통찰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시는 출소 뒤에 곧바로 국가 경영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전범의 족쇄가 채워져 공직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자 기업인으로 활약했다. 연합국의 일본 점령이 끝난 1952년, 공직추방령이 해제되자 정치 일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일본재건연맹'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참패를 거뒀다. 선거 패배 뒤 독일을 방문한 기시는 같은 전범 국가인데도 독일의 경우에는 재무장이 허락됐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신속하게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 정치권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귀국 후 그는 보수정당간의 합당논의를 시작했다.
그는 정당들 간의 복잡한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 자유당과 민주당을 합한 새로운 보수신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을 만들었다. 온건 보수주의부터 극우를 망라한 자민당은 이후 일본의 집권 여당으로 군림하며 일본 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에 올랐다. 1급 전범이 일본 정계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기시가 정치인으로서 급성장한 이 시기는 '55년 체제'가 만들어진 때다. 1955년 이후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야당인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 구조가 형성된 체제를 말한다.
◆쇼와의 요괴= 일본의 전후 질서 체제의 상당부분은 기시에 의해 완성됐다. 그가 정치적 운명을 걸면서까지 통과시켰던 '미일 안보조약' 덕분에 일본은 불평등한 미일 안보조약을 수평적인 조약으로 바꿀 수 있었다. 아울러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분명히 한 덕분에 일본은 안보 부담을 던 채 경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기시는 총리가 된 후 경제는 관료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외교ㆍ치안에 몰두했다. 패전 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동남아를 두 차례 방문하며 아시아 중시 노선을 펼쳤다. 이 때 아시아를 원조하기 위해 창립한 것이 아시아개발기금이다. 기금을 통해 기시와 동남아와 관계도 깊어졌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타이완의 장제스와의 친분도 이 때부터다.
기시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자민당 역시 안정적인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밑바탕 구실을 하며 일본의 전후재건과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국회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시위를 불러일으키며 비난을 받은 채 총리직을 물러났다.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되찾는 동시에 미국, 한국 등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냉전에 일부 가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막후에서 일본 정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쇼와의 요괴'로 불렸다. 쇼와시대는 쇼와 일왕(日王)이 통치한 1926년 12월25일부터 1989년 1월7일까지를 가리킨다.
기시가 일본 경제에 미친 영향도 컸다. 시장경제를 용인하면서도 계획적인 통제를 통해 정부주도형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기시의 모델은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토대가 됐다.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정부주도형 성장모델이 된 '일본주식회사'와 55년 체제의 창업은 거의 기시에 의해서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기시가 궁극적으로 추진하기를 원했던 개헌은 그의 생전에 이루지 못했다. 전후 질서체계를 깨려는 목표는 그의 외손자 아베 신조에게로 이어졌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