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번째 소녀 보낸, 이 여름 어느날…우린 이렇게 말도 못하고 지고 마는가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난 현실주의자야. 때가 되면 가는 거지…. 여기가 그이가 앉던 자리였어."
지난 6월10일 오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유희남(85) 할머니는 거실 모퉁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故) 배춘희 할머니가 자주 앉던 자리다. '현실주의자'라는 말과 함께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유 할머니는 오전엔 배 할머니의 노제에 참석했다. 평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공개행사에 잘 나서지 않던 그다. 배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유 할머니는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착용해 얼굴을 꽁꽁 싸맸다.
"내가 어디 갔다 올 동안 죽지 말라고 부탁하고 갔는데 갔다 오니까 벌써 세상을 떠나서 정말로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갈 길이니까 갈 길을 갔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한을 풀지 못하고 간 것이 너무나 섭섭합니다." 오전 노제에서 유 할머니는 이 짧은 몇 마디를 건네면서도 연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눔의집 2층 식당에 놓인 식탁엔 자리마다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사진이 유리에 끼워져 있다. 배 할머니가 앉던 자리의 사진은 이날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강일출(86) 할머니의 요청으로 전날 이미 치워졌다. "밥 먹는데 뭐 죽은 사람 사진 보는 거 싫어서 내가 빼달라고 했어." 강 할머니는 평소 배 할머니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었다. 주인 잃은 자리는 지금도 비어있다. 얼마 전 나눔의집에 입소한 이옥선(87) 할머니도 배 할머니의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에게 죽음은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도, 피하고 싶은 그 어떤 것이기도 했다.
평소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자주 입고 사람들 앞에서도 노래를 즐겨 부르던 배 할머니는 올 3월 감기에 걸리면서 급속도로 노쇠해져 갔다. 2주가 넘도록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결국 4월께에는 몸 상태가 악화돼 한 달 동안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기력을 회복한 뒤 나눔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배 할머니는 다시 한 달을 꼬박 누워만 있었다. 평소 미신을 철썩같이 믿던 배 할머니가 "이달엔 몸을 움직이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중치료실에 누워있던 배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에는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배 할머니는 '온 몸이 아프다'고 하고 어느 때는 '다리도 저리다'는 등 아프다는 소리를 많이 하셨는데 이날은 전혀 그런 소리를 안 하데요." 임명자(57) 요양보호사는 배 할머니에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새벽 4시쯤 할머니를 보니 눈이 이상하더라고요. 바로 119에 신고했는데 5시를 못 넘기시고 돌아가셨어요." 결국 배 할머니는 지난 6월8일 오전 5시 끝내 세상과 끈을 놓았다. 19세에 중국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지 72년 만이다. 스님이 되고 싶다는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평소 배 할머니의 바람대로 유골은 합천 해인사에 모셨다. 배 할머니가 생활안정자금을 모아 남긴 전재산은 중앙승가대학교에 기부할 예정이다.
배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사망자는 183명으로 늘었다. 생존 할머니 수는 54명으로 줄었다가 지난 8일 경북의 박○○(92) 할머니가 추가로 등록하면서 다시 55명이 됐다. 배 할머니는 고(故) 강덕경ㆍ김옥주ㆍ문명금ㆍ김순덕ㆍ박두리ㆍ지돌이ㆍ문필기ㆍ박옥련 할머니에 이어 아홉 번째로 나눔의집에서 생을 마쳤다.
영정 속 배 할머니는 짙은 화장과 보라색 조끼를 입고 평소 화려한 모습 그대로 조문객을 맞았다. 배우자도 자식도 없는 배 할머니의 상주는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과 박재홍 과장이 맡았다. 배 할머니를 모신 나무관은 10일 오전 7시40분 경기 분당 차병원 장례식장을 출발해 약 한 시간을 달려 나눔의집에 도착했다. 17년여를 나눔의집에서 살았던 배 할머니는 마지막 2시간을 보내고 합천 해인사로 향했다.
경상북도 성주가 고향인 배 할머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정신대'에 자원했다. 일본 군인들의 성노리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배 할머니는 광복 후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수년간 중국을 전전하다가 1951년 2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엔카(성인가요) 가수로 활동했다.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것은 1981년. 3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는 아픔을 겪은 후 1997년 나눔의집에 입소했다.
활동적인 배 할머니는 나눔의집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광주 시내를 자주 찾았다. 광주 시장에서 답답한 마음도 달래고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옷과 장신구들을 사기도 했다. 광주시장 인근에서 의류도매업을 하고 있는 류재찬(50)씨가 배 할머니를 처음 본 곳도 광주 시장이었다. 류씨는 "광주시장에서 유명했어요. 눈에 띄는 화려한 색상의 옷에 짙은 화장. 그때는 그냥 독특한 할머니구나 싶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류씨가 배 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지난해 8월. 취미로 통기타를 연주하던 그는 나눔의집 할머니들을 위해 성금을 모으고자 전국 각지의 동호인들을 모아 통기타 공연을 준비했다. "나눔의집에 공연을 하러 갔는데 배 할머니가 거기 계시더라고요. 이때 알았죠. 저희가 가면 노래도 불러주시고 말씀도 많이 하시고 어찌나 살갑게 대해주시던지."
경기도 성남시청에서 두 번째 공연을 할 때에는 배 할머니도 무대에 올랐다. "공연이 끝나고 배 할머니를 무대로 모셨더니 장윤정의 '꽃'을 얼마나 구성지게 부르시던지. 친할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할머니랑 지냈어요."
엔카 가수였던 배 할머니는 평소에도 성인가요 프로그램을 자주 봤다. 아이들이 나눔의집을 찾으면 '칠갑산', '소녀 아리랑' 등을 불러줬다. 때론 만주 독립군 노래나 일본 대중가요도 배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왔다.
소녀 같던 배 할머니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나눔의 집에서 그림 수업을 받은 후에는 볕이 좋은 날이면 마당에 나와 돌에다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마당 한 켠 돌에는 배 할머니가 그려 넣은 노란색 한복을 입은 소녀가 비바람을 견딘 채 남아있다.
활동적인 배 할머니는 노환으로 기력이 떨어지면서 삶의 의지를 잃어갔다. 말수도 적어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했다. 5년 전부터 나눔의집에서 자원봉사를 해온 김모(41ㆍ경기 분당)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에 아버지가 태몽을 꾼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애들 세 명이 뛰어 노는 꿈을 꾸셨는데 정확치는 않은 것 같지만 할머니도 삼남매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나 이제 죽으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 잘 들어 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라며 배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들은 말을 전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가족이 없어서 그런지 끝에 편찮으실 때는 삶에 대한 의지가 없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끈을 놓으신 거 아닌가 싶어 더 안타까워요. 살고 싶다는 의지가 없으시더라고요." 어린 아들, 딸과 함께 배 할머니의 노제를 지키던 김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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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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