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7. 김군자 '하루에 40여명 상대로 성노리개 생활'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군자(88)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1942년 우리 나이로 17살때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는 할머니는 "하루에 40여명을 상대로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위안소 생활을 기억했다. 2007년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증언했다.
또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등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자신처럼 부모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2000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1998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8. 김달선 '포항 시장서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1925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난 김달선(89) 할머니는 흥해시장에서 일본 순경에 의해 경찰서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인도네시아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약 5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1946년 봄 무렵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23세쯤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과 3년 만에 헤어졌다.
현재 김 할머니는 치매 증상과 노환으로 지난해 5월부터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오랫동안 봐온 낯익은 얼굴은 아직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지난 5월30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들은 이 병원을 찾아 할머니의 조촐한 생일잔치를 열었다.
#9. 김복동 '14살부터 8년간 고통, 열혈 인권운동가'
경남 양산 출신의 김복동(88) 할머니는 14살에 위안소로 끌려가 8년의 세월을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인권운동가다. 2년 전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전쟁 피해 여성을 돕겠다"고 선언하고, 일명 '나비기금'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재일조선학교를 지원하는 후원금도 내놨다. 할머니는 왼쪽 눈을 실명했고, 최근 오른쪽 눈도 시력이 악화돼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 요즘 수요집회 때마다 선글라스를 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만난 김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앵무새처럼 맨날 똑같은 말만 하니 입이 아플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왕 칼을 뺏으니 끝을 봐야지"라고 말을 이었다.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시리즈 중 계속됩니다.
◈기획 시리즈 진행 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명이 공식 인정돼 시리즈 제목을 '위안부 보고서 54'에서 '위안부 보고서 55'로 바꿉니다.
▶'위안부 보고서 55' 온라인 스토리뷰 보러가기: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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