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먼 친척 중에 '남장여자'가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언제나 양복을 입고 새카만 구두를 즐겨 신었다. 목소리도 괄괄해 영락없는 샌님이었다. 읍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촌락에 살았는데 그 집 대나무는 하늘을 찔렀고 오색천이 바람에 나부꼈다. 굿도 하고 점도 봐주는 집이라고, 친척 어른이 귀띔했다.
남장여자는 용한 점쟁이었다. 그 족집게로부터 어느 핸가 운세를 봤다.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절대 물 가까이 가지마. 큰일 나니깐." 어린 나이에 그 말이 무서웠나보다. 결국 그해 여름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여름에는 물 조심, 겨울에는 불 조심, 길 갈 때는 차 조심, 연애할 때는 사람 조심, 사업할 때는 돈 조심하라는 것은 점쟁이들의 상투어다. 중년 여인이 과년한 딸을 데리고 점집을 찾는 건 십중팔구 결혼 때문이다. 지지리도 궁상맞은 표정의 남자가 복비를 내는 건 직장이 궁해서다.
눈치코치는 점괘의 시작이다. 제아무리 용한 점쟁이도 우주 삼라만상의 수수께끼를 알 턱이 없다. 그리스 신탁도 무녀의 횡설수설을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이지 않던가. 그런데도 점쟁이 말에 귀가 솔깃한 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궁금증(또는 두려움) 때문이다. 선거철이나 입시철 용하다는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다.
월드컵 시즌, 이영표 한국방송(KBS) 해설위원이 화제다. 전 대회 우승팀 스페인의 몰락을 예측했고 이근호 선수의 '한 방'도 내다봤다. 한국과 러시아의 1대1 무승부를 맞춘 축구게임도 있다. 온라인 축구게임 '풋볼데이'가 1만 번 시뮬레이션했더니 그 같은 점괘를 얻었다. '월드컵 족집게'라면 독일의 점쟁이 문어 '펠레'를 빼놓을 수 없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8경기에서 승리팀을 맞췄다.
그러나 펠레 점괘는 학습 효과와 우연의 합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영표 위원의 예언도 그의 수많은 해설 가운데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바넘효과'로 해석할 수 있다. 풋볼데이는 선수 기량과 팀 전술 등 '빅데이터'에 의존해 무승부를 점쳤다. 그러니 '신의 계시'는 애초부터 없었다. 우연, 과학, 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족집게 예언을 고대하는 것은 우리 팀의 선전에 대한 염원 때문이다. 꿈이 현실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신은 우리 편일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나저나, 그 남장여자는 훗날 어느 교회 목사가 됐으니 역시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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