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낱말의 습격]중구난방의 숨은 뜻(36)

시계아이콘02분 09초 소요

[낱말의 습격]중구난방의 숨은 뜻(36) 낱말의 습격
AD



서양의 파티는 입식(立式)인 반면 우리의 잔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모임 문화는 좌식(坐式)이다. 술잔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몇 명이서 둘러서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헐리웃 영화는 내게 여러 번 보여줬다. 좌중의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슬쩍 딴데로 가면 된다. 파티 장소 전체는 자율학습을 하는 아이들의 교실처럼 소란스럽고 그 소음 사이사이에 저쪽 무대에선 열심히 연주음악을 넣어준다. 파티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대화 상대를 자유롭게 고르는, 그 형식적 측면이다.


우린 이게 안된다. 한번 앉으면 그만이다. 어쩌다 좌석이 배치되었는데, 옆사람이 좀 서먹하거나 대화의 공통화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임이 영 재미없어질 때도 있다. 그렇다고 낯익은 사람만 찾아 억지로 자리를 고집하다 보면, 체신머리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될 수도 있다. 누구 옆에 앉느냐가 중요하기에, 그것을 아예 관행으로 정해놓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좌식은 토론 무리를 고르는 일이 쉽지 않다. 당연히 대화할 거리도 빈약해진다. 서로 멀뚱멀뚱 앉아있기가 민망하니 음식을 권하고 술을 따르는 일에 치중하게 된다. 술기운에 낯이 풀어져서 대화의 물기가 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토론은 그래서 자주 술김에 털어놓는 '오버한 말'들의 교환이거나, 혹은 무난한 공식적 화제들을 우려내는 경우가 많다.


앉은 무리무리의 작은 토론장이 별로 재미없다 보니, 전체 회식자리는 자주 '사회자'에 의지하게 된다. '지방방송'은 통제되고 사회자로 지목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전체적인 운영에 협조를 해야한다. 사회자가 없는 경우는 대개 연장자이거나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 혹은 음식값 내는 호스트가 발언권을 쥔다. 한 사람의 입이 시종일관 문제 제기를 하고 결론을 내리는 동안, 수많은 좌중의 귀는 그걸 묵묵히 들어야 한다.



우리가 왜 토론에 약하고, 논쟁과 전쟁을 잘 구분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파티와 잔치의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다. 궁둥이를 붙이고 일방통행의 말하기와 듣기로 일관하는 잔치는, 얼핏 보면 많은 대화를 나눈 듯이 보이나 실은, 수다와 침묵이 그저 동석한 것일 뿐이다. 우린 이 희한한 구술(dictate) 체제에 익숙하며, 각종 술자리의 독재자(dictator)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거부감은 거꾸로 작동한다. 한 사람이 얘기하고 여러 사람이 듣는 시스템이 아니면 왠지 불안하다. 대번 이 얘기부터 나온다. 어이, 지방방송 꺼. 서양의 파티는 오로지 지방방송들의 합계이며, 우린 꼰대가 엄격히 통제하는 '중앙방송 술자리'다.



중구난방이란 말은 참 묘하다. 衆口難防의 뜻 그대로를 풀면, '여러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댄다'라고 말할 때의 '중구난방'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해서 통제가 잘 안되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표현한다. 여러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떠올리면, 왜 소란스런 좌중이나 소모적인 논쟁 만이 떠오를까. 중구난방에는 왜 긍정적인 기미가 별로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면 여러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무리의 소통의 활발함을 암시할 수도 있고, 또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진실'은 가릴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닐 수도 있겠는데, 그런 좋은 의미들은 왜 휘발하고 없을까.



나는 그 비밀을 '저 중앙방송 술자리'에서 찾는다. 중구난방의 주어는 중구(衆口;많은 사람들의 입)가 아니다. 중구난방의 주어는 따로 있다. 그것은 중구를 통제하는 술자리의 권력자이다. 바로 지방방송을 통제하는 중앙방송님이다. 이 중앙방송님은 오로지 중구(衆口)를 컨트롤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중구가 마구 말을 쏟아내면 자리가 혼란스러워진다. 한 사람씩 말을 한다면 그는 일대일로 찍어누를 수 있다. 큰 손바닥을 내밀어 입을 막으면 된다. 그게 방(防)이다. 그런데 이곳저곳에서 말하면 그럴 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난방(難防)'이다. 그러니까 중구난방은 오로지, 입을 틀어막는 권력자가, 여러 사람이 떠드는 통에 난감한 상황이다.



그리 많지도 않을 권력자의 강박관념이, 어찌 하여 이 사회에서는 보통사람들의 입에 그토록 자주 오르내릴까. 우리 내부에 이미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독재자(dictator)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구술하고 구술받아야만 안심하는, 일방통행의 가짜토론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견이 발호하고 창궐하는 걸 못견디는 마음. 그 가닥들을 모두 잘라버리고 한 줄기 굵은 이야기만 붙들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마음. 이것이 우리의 발언환경을 옥죄어온 건 아닐까. 술자리에서 '원치 않는 지방방송'이 계속 되면, 이쪽 독재자님의 재떨이가 날아가는 풍경이, 우리가 논쟁이라고 벌인 좌판 속에선 과연 없는가.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607:30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이현우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한국인의 장례식이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가운데, 우리 정부도 해당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매체 등에서 우크라이나 측 국제의용군에 참여한 한국인이 존재하고 사망자도 발생했다는 보도가 그간 이어져 왔지만,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확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2.0309:48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조응천 전 국회의원(12월 1일) 소종섭 : 오늘은 조응천 전 국회의원 모시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솔직 토크 진행하겠습니다. 조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조응천 : 지금 기득권 양당들이 매일매일 벌이는 저 기행들을 보면 무척 힘들어요. 지켜보는 것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