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삶을 버리고 죽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죽지 못해 삶을 잇는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지요."
1987년 초연된 연극 '불가불가(不可不可)'에서 극 중 계백장군이 그의 처와 나누는 대사다. 황산벌 전투에 출전하기에 앞서 결사항전을 다진 계백이 가족의 목숨을 거두는 장면을 극화한 대목이다.
기억력이라는 게 참 신기하게도 바로 어제의 일은 가물가물한데 20여년 전 보았던 연극의 대사는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이 작품은 연극의 최종 리허설을 극중극 형태로 짠 것인데, 생애 처음 본 연극이기도 하거니와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도 울림이 컸던 모양이다.
이 연극은 여성 연기자가 상반신을 드러내는 반라(半裸) 연기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연극이 반향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그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에서 유추되듯 이 연극은 '불가 불가' '불가불 가' '불 가불가'라는 언어 유희를 이용해 당대의 무기력한 역사 인식을 꼬집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본질을 호도하는 부조리한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연극은 무대 한 켠에 구한말 어전회의를 함께 연출하는데, 풍전등화 같은 국운을 논하는 그 자리에서 조정 대신들은 절대 안된다는 것(불가 불가)인지, 어쩔 수 없지만 된다는 것(불가불 가)인지, 되지 않지 아니하다는 것(불 가불가)인지 모를 흐릿한 발언을 늘어놓는다. 연극은 우유부단한 신하 역을 맡은 선배 배우를 역에 몰입한 계백 역의 신인 배우가 무대 왼쪽 백제 땅에서 오른쪽 구한말 편전으로 시공을 넘어가 소품용 칼로 내리치면서 막을 내린다.
문득 오래전 기억을 되짚어 이 연극이 떠오른 것은 지난주 금요일 법원의 판결이 있었던 끔찍한 사건들 때문이다.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칠곡 계모'와 '울산 계모'에게 각각 징역 10년과 15년이 선고됐다. 지난해 발생했던 이 두 사건은 지속적으로 자행된 반인륜적 아동폭행ㆍ학대가 치사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때문에 판결이 있은 후 '죄값'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여론이 많다. 형량을 두고 고민했을 1심 재판부는 사건의 위중함을 경고하면서도 계모들의 폭행에 살인의 고의성이 없다고 봤다. 여론은 '불가 불가'였으나 판사는 '불가불 가'를 택한 것이다.
어제(13일) 이찬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아동학대 통계는 더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해 공식 보고된 아동학대 건수는 6796건이었는데 이중 80% 이상의 가해자가 친부모(76.2%)를 포함한 부모였다. 발생 건수만 보면 2001년(2105건) 이후 10여년 사이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발간된 '2012년 전국 아동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2년까지 총 97명의 아동이 학대로 숨졌다. 또 아동에 대한 학대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절반 가까운 47.1%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동폭행과 학대, 유괴 등 어린이들에 대한 범죄에 관한한 우리의 태도는 '불가 불가'여야 하는 이유다. '불가불 가'가 되거나 '불 가불가'라 어물쩡거리는 순간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김동선 기획취재팀장 matthe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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