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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파멸시킬 뻔 했던 '규제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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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2009년 3월21일 일련의 시위대들은 미국의 대표적 보험사 AIG 고위 임원들이 사는 코네티컷주 페이필드 카운티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던 금융기관들이 정부의 지원으로 간신히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 임원들에게 보너스 잔치를 벌였던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는 50억달러 이상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금융사회에서는 가계소득이 25만달러를 넘는 직원들의 보너스를 90%까지 과세할 수 있는 규제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티머시 가이트너 당시 미 재무장관은 며칠 뒤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 금융시장, 특히 파생상품에 대한 강력한 규제에 나서겠다고 밝혔었다.


2008년 미국의 초대형 모기지론 업체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촉발된 경제위기는 오늘날까지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 경제가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이젠 안심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930년대 대공황에 비견되는 금융위기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강타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대선 출마에 앞서 지난 4년간을 술회했던 선거 동영상을 보면 2008년 금융위기가 얼마나 미국 사회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는지 알 수 있다. 곳곳에서 기업들이 파산했고, 사람들은 집과 일자리를 잃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분노해야 할지를 모른 채 망연자실했었다.

왜 미국은 파멸적인 위기를 맞았을까?


당시의 금융위기를 두고서 전문가들마다 다양한 설명을 내놓는다. 하지만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대체로 모이는 하나의 설명이 있다. 미국 금융시장에 거대한 규제로 자리잡았던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을 철폐시킨 그램-리치-브라이리법(Gramm-Leach-Bliley Act)이 위기의 큰 요인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글래스-스티걸법은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을 거치면서 대공황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꼽혔던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 법안이다. 폭주했던 투자은행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해 경제공황이 발생했다는 반성 속에서 탄생했던 법이다. 글래스-스티걸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완전한 분리, 상업은행에 대한 규제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경제공황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이 법은 미국 금융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규제’로 지목받았다.


그 결과 1999년 미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글래스-스티걸법을 사실상 폐기하는 그램-리치-브라이리 법이 통과됐다. 투자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늘리며, 미국의 금융산업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램-리치-브라이리법이 도입되어 금융사가 지주회사 형태로 여러 개의 은행 또는 다른 은행지주회사가 소유가 가능하졌다. 이 법 덕택에 미국의 금융산업은 그동안의 규제가 풀려 상업은행, 투자은행, 보험업간의 장벽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이 법은 불과 10년이 안된 시점인 2008년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꼽히게 됐다. 금융산업간의 칸막이를 사라지게 만들어 위기를 특정한 금융 기업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 전체의 위기로 전이시켰다는 것이다. 규제가 남아 있었다면 투자은행이 무너져도 보험과 상업은행은 무사했을 테지만, 규제완화의 영향으로 다같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셉 스티글리츠 역시 그램-리치-브라이리법이 2008년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는 입장을 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로버트 쉬어 역시 글래스-스티걸법이라는 규제를 없앤 것이 2008년 경제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이 외에도 상당수 사람들은 미국의 금융 규제완화 법안이었던 그램-리치-브라이리법이 미국 금융산업의 대마불사론을 가능하게 만들어, 파국을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그램-리치-브라이리법이 2008년 금융위기의 원흉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이미 이 법 도입 이전에 풀려버린 규제들 때문에 글래스-스티걸법의 규제는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견해를 피력한 사람들 역시 글래스-스티걸법이 제대로 유지됐다면 위기를 막거나 감기처럼 지나가는 위기에 그쳤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을 파멸시킬 뻔 했던 이 법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있을까?


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백악관에 건네졌을 때 사인한 대통령은 빌 클린턴 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법에 대한 책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재임 기간 중 미국 경제를 활기차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은 클린턴은 최근 포천 선정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 가운데 당당히 5위를 기록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또한 그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차기 유력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또한 당시 재무장관으로 이 법안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로버트 루빈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로 장관직을 사임한 뒤에 씨티은행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이후 시티그룹에서 8년간 받은 급여는 1억2600만달러였다.


그램-리치-브라이리법을 실제 만들었던 필 그램 의원은 텍사스주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다 2002년 의원직을 관두고 투자은행 UBS의 로비스트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UBS 그룹 자회사의 부회장까지 올랐다. 그는 영국의 가디언지 선정 세계 금융 붕괴 주역 25인 중의 1명으로 꼽혀 망신을 당했을 뿐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많은 미국인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살았다. 미국인들의 분노는 월스트리트를 향해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을 파국으로 이끌었던 규제개혁의 장본인들은 자신이 망친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여전히 잘 살고 있다. 규제개혁을 말하기는 쉬워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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