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5만원권 고액 지폐가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결코 시중에 5만원권이 적어서가 아니다. 한국은행에서 열심히 찍어 내는데도 수요를 따라잡기 어렵다. 5만원권 발행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전체 지폐의 3분의 2에 가까운 62.8%나 된다. 이렇게 많은 5만원권이 발행됐는데도 구하기 어려운 것은 상당수 5만원권이 유통되지 않고 어딘가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박근혜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과 강화된 세무조사에 불안감을 느낀 일부 자산가들이 금융기관에서 고액의 현금인출을 꾀하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세제 측면에서 보면 현금인출은 세금 탈루와 동격이다. 예를 들어 보자. 현금 10억원으로 부동산을 취득하면 취득세를 내야 한다. 부동산 보유에 따라 재산세가 부과되며 이를 처분할 때는 양도소득세가 나온다. 부동산을 무상으로 자식에게 넘길 경우에는 증여세 또는 상속세를 부담해야 한다.
이와 달리 현금 10억원을 장롱에 넣어 두고 있으면 취득세는 물론 재산세, 양도소득세가 없다. 자식에게 무상으로 이전할 경우에도 과세관청이 모르기 때문에 태반이 증여세나 상속세 없이 넘어간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현금영수증 발행 제도, 사업용 계좌 제도 등을 운용하고 있지만 현금 사용으로 인한 탈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근 개정된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금융정보분석원ㆍFIU법)을 보더라도 본인 계좌에서 타인에게 이체하는 것은 과세관청에 통보될 수 있지만, 현금인출은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조세의 공평부담 원칙에 맞춰 고액 현금인출 자체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현행 세법은 이미 유사한 제도를 두고 있다. 상속세법에서는 피상속인이 사망 2년 이내에 본인 계좌에서 현금으로 인출하였으나 그 돈의 사용처가 분명하지 아니한 경우 인출된 현금을 상속인에게 상속한 것으로 추정하여 상속세를 부과한다. 고의적으로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산을 현금화하여 상속인에게 몰래 주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세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현금을 내준 은행에서 원천징수하는 것이다. 즉, 고액 현금인출 시 지급은행에서 해당 금액에 대한 증여세 세율을 적용하여 일단 원천징수하고, 나중에 증여가 아닌 것으로 입증될 경우 원천징수한 증여세를 환급해 주면 된다. 현행 근로소득세 연말정산 방식과 유사하다.
모든 현금인출 거래에 대해 과세하는 것은 과세행정상 무리다. 현행 증여세법에서도 직계존속이나 직계비속으로부터 10년 동안 3000만원 이상을 증여받는 경우 과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기준을 준용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고액 현금인출에 대한 증여세 부과는 전혀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다만 증여세 부과 시점을 현금인출 시점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현행처럼 현금을 증여받은 시점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어차피 장롱 속 돈은 대부분 자식에게 증여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과세관청이 증여 사실을 잘 모르는 데 비해 전자는 과세관청이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고액 현금인출에 대해선 인출 시점에 증여세를 부과하자는 것이다.
은행에 돈을 넣어 두면 이자가 생길 뿐만 아니라 좀먹거나 불에 타서 못 쓰게 되지도 않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않는다. 냄새나는 돈을 장롱 속에 넣어 두는 것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경제행위가 아니다. 이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조세의 공평부담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증여세 과세 체계에 비춰 보아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징수체계에 무리가 없다. 다만 현 정부의 실행 의지 유무가 문제라면 문제일 뿐이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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