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끝내고 짐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 한 묶음을 발견했다.(이사에 관한 얘기는 지난주 이 자리에서 했으니 혹 궁금하면 참고하시길)
사진들은 잡다한 서류 더미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 있었다. 전 직장 퇴직서류, 보험 계약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권 목록(인터넷에 떠도는 걸 프린트한 것인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영어학원 수료증 등등과 한데 섞여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하고 이 집 저 집 끌고 다니는 걸까. 버리자니 나중에 꺼내 볼 일이 생길 거 같지만, 다시 이사 갈 때까지 한 번도 들춰 본 일 없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물건들과 뒤섞여 있는 대여섯 장의 사진.
사진 속 나는 고통에 찬 얼굴로 달리고 있다. 짧은 팬티와 민소매 셔츠를 입고, 배에 번호판을 달고 있기에 달리는 중이라는 느낌이 전달될 뿐 몸동작에는 전혀 속도감이 없다. 어찌 보면 그냥 천천히 걷는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 쓴 모자는 온통 땀으로 범벅된 상태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도중에 찍힌 스틸 사진이다. 사진 모서리에 '2006년 ○월○일'이라고 적혀 있다. 대략 7년 전 내 모습이 분명하다.
지금은 사진 몇 장으로 남았을 뿐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40대 초중반 달리기에 열중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만 나면 팬티 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1시간은 보통이고 기분 내키면 2시간 이상 달리기도 했다. 주말은 물론 주 중 새벽에 한강 고수부지 등을 달렸다. 겨울에는 두툼한 장갑에 귀를 덮는 솜 모자, 바람막이로 중무장을 한 채 뛰었고, 장마철에는 온몸이 흠뻑 젖고 운동화에서 물이 찍찍 나와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뛴 덕에 몸무게가 10㎏ 이상 줄고 허벅지와 종아리에 근육도 제법 붙었다. 그러다 무슨 영문인지 어느 날 딱 멈춰버렸다. 기억에 남는 계기도 없다.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끝났다.
사진 속 고통스러운 표정의 내가 문득 안쓰러워진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저토록 달리고 또 달렸을까?
이어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한 남자와 그가 남긴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이다."
<치우(恥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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