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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윤병무의 '처음과 사이' 중에서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8초

어깨에 걸려 있던 노란 바바리코트 자락이/살짝 나부끼면서 금발 가발의/여인은 침대로 쓰러진다/여인의 새까만 안경알에/카펫에 웅크리고 앉아 텔레비전 보며 끊임없이 통조림을 먹어대는/사내의 옆모습이 열려진 냉장고 조명을 받는다//새벽의 푸른빛이 창문에 번져올 때까지도(.....)처음 만난 여자,/처음 잠든 여자를 지나,/처음의 사내는 세면장에서 넥타이로/여인의 흰 구두를 닦는다(.....)


윤병무의 '처음과 사이' 중에서


■ 1995년 가을에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영화가 아니라 인생에 녹아든 운명의 한 장면같은 것이 됐다. 광고회사의 동료였던 선배는 밤새도록 맥주를 들이키며 노랑머리 가발의 임청하를 이야기했다. 얼마 전 신문에 기획시리즈를 할 때 '유통기한'을 속이는 부정직을 다루는 기사가 나왔는데, 나는 바로 경찰223인 금성무가 중얼거리던 유통기한에 관한 개똥철학을 떠올렸다. 또 여름 패션을 소개할 땐 레인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임청하의 전천후 차림이 바로 떠올라, 그것을 찾아다 쓰고 헤드라인으로 달기도 했다. 금성무의 생일날, 임청하는 그녀가 거래하던 마약밀매원을 제거한다.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은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금성무는 그 술집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와 사랑을 하기로 결심했었고, 임청하는 일을 치른 극도의 피로감에 자고 싶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호텔에 갔고, 정말 자고 싶은 임청하는 잠을 잤고 금성무는 그녀의 신발을 벗겨 주고 떠난다. 이 장면이 왜 이리 아릿하게 남는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이 서글픈 고독과 연민의 이미지들. 시끌벅적하고 복잡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헐벗은 청춘의 초상. 중경삼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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