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은 남녀 사이의 핑크빛 그것이 아니라도 충분히 소중하고 의미 있기 마련이다.
거창하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본 세상의 모습(물론 기억하는 이가 드물겠지만)이라거나 죽음 이후 마주치는 첫 장면(이론상으론 가능하지만 글쎄 이 또한 증언해 줄 이가 마땅치 않으니, 거참…)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특종거리도 있겠으나, 내 경우 아주 소소한 것들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라면과의 첫 만남이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아닌가 싶은데, 어쩜 세상에나, 이런 맛도 있나 싶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가격이 꽤 비쌌던 탓인지, 아니면 집안 형편이 라면을 감당할 만큼 넉넉지 못했던 것인지, 자주 맛보기 힘들었다.
지금은 라면을 잘 먹지 않게 됐는데(식당에서 부대찌개나 김치찌개를 시켜 먹을 때도 라면사리는 절대 사절이다) 군대시절 질리게 먹어 댄 덕분이다. 남들이 평생 먹어도 남을 정도의 분량을 1년 사이에 해치웠다. 하루 세 끼는 물론이고 야식에 술안주까지 라면으로 해결한 날이 적지 않았다.(맛에 변화를 주기 위해 별 궁리를 다했는데, 물과 스프의 양을 이리저리 조절하는 건 기본이고 고추장을 풀거나 마늘 또는 풋고추를 잘게 썰어 넣은 라면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라면이 지겨워져 영영 결별한 지가 꽤 오래전인데 라면과의 첫 만남이 여전히 판타스틱하게 남아 있는 건 대체 어떤 연유일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불가해한 현상이자 내 인생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꼭 라면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악연이 적지 않은데 첫 만남만큼은 아직도 환상적인 이가 몇 있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나마 다행은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첫 경험은 기억에 없는데 세월이 갈수록 존재가 뚜렷해지는….
사람도 음식과 마찬가지여서 어떤 이는 세월에 썩어버리고, 어떤 이는 익어 가는 모양이다.
<치우(恥愚)>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