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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이빈섬의 '치마詩'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0분 46초

치마폭 위에 시를 쓴다 너울대는 너의 춤 사뿐대는 너의 깁버선 어깨를 타내려오는 바람과 드는 바람과 앙가슴 돋는 한 소끔 불길을 연지(硯池) 삼아 붓끝 나붓 나부낀다 너의 외로움을 흥으로 돋워 너의 입술을 침묵으로 태워올려 너의 허리를 스무 해 징징 감은 울음으로 감아들어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을 헛것 움켜잡듯 펄렁이고 펄렁이어 풍경은 비웠으나 눈이 비우지 못하는 여운으로 결구(結句)지었으니 먹끝 흐르는 치마에 싸여 네가 우는//너의 치마폭 위에 시를 쓴다 짧디 짧은 너의 치마, 미니를 넘어 하의실종 패션에 이르러 마치 스티커 메모용지처럼 거시기한 거기에 다급하고 내용없는 사랑을 쓴다 하이쿠를 읊기에도 숨찬 생각이 바코드 몇 개로 풀리면서 눈물이 절로 흐른다 상심은 스마트하다 5인치 화면 속에 반뼘 요를 깔고 바늘같은 마음이 눕는 B급 로망스, 지하철 너의 다리 위에 얹힌 비좁은 시전(詩箋) 자리 느린 검지로 스물거리는 문자메시지 운을 찍는다 나비처럼 도망가며 나부끼는 여인은 아름답다 쓰려다 붓꺾고 남는 마음이 백짓장 맨살 위에 헤나로 그린 나비가 되어 천년 시천(詩天) 나들며 터진 마음을 그제야 네가 우는


■ 옛 사람들은 흥이 발동하면 여인의 치맛자락에 붓으로 시를 썼다.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갈 때마다 탄성이 튀어나오고 시인이 생각에 잠길 때마다 긴장의 침묵이 흘렀다. 시는 국어 시험문제의 제시문이 아니라, 삶의 가장 높은 기쁨이었고 놀이의 백미였다. 인간이 목구멍으로 시를 되삼켜버렸을 때부터, 우린 놀 줄 모르는 존재가 된 것인지 모른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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