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계좌에 대해 박근혜정부가 제법 으름장을 놓고 있다. 박 대통령부터 차명계좌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번 피력했다. 국세청 업무계획을 보면 차명계좌는 올해 세무조사의 최우선 타깃이다. 기획재정부는 차명계좌에 은닉된 재산을 증여된 것으로 보고 세금을 부과하는 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강화하는 입법을 추진 중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보유한 기업ㆍ금융 관련 정보를 국세청이 공유하게 한다는 정부 방침도 차명계좌 문제와 무관치 않다. 차명계좌에 대한 일제단속이 시작된 모양새다.
그러나 그뿐이다. 차명계좌는 움찔할 수는 있어도 크게 겁먹진 않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일망타진될 차명계좌가 아니다. 잔챙이라면 몰라도 큰손 차명계좌는 정부의 속셈을 눈치채고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의 속셈은 복지공약 이행에 필요한 재원 확보에 있지 차명계좌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자는 게 아니다. 도망갈 구멍은 봐 두었으니 여차하면 그리로 튀면 된다. 우둔한 차명계좌는 재수 없이 걸릴 수 있겠지만, 똑똑한 차명계좌는 걸릴 리가 없다.
이런 반응은 1993년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후 20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가 차명계좌를 묵인하는 느슨한 형태로 도입됨에 따라 그동안 차명계좌가 온갖 비자금, 뇌물, 범죄자금, 변칙증여ㆍ상속 재산의 은닉처나 전달경로가 돼 왔다. 예를 들어 삼성과 SK그룹 등 기업 및 은행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관련된 수많은 비자금 사건에서 차명계좌는 단골메뉴였다. 요즘도 하루가 멀다 할 정도다. 불법도박 혐의로 기소된 연예인 김용만씨는 도박자금 관리에 차명계좌를 이용했다고 하고,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비자금 관리에 사용한 차명계좌가 추가로 발견돼 또다시 금융감독원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차명계좌가 만연해 있다는 뜻이고, 단속만으로는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지하경제를 뿌리 뽑을 수 없다는 증거다.
게다가 차명계좌를 법규상 명시적으로 불법화하는 동시에 위반자의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금융실명제를 보강하는 방안은 폐기처분될 운명에 처했다. 지난달 중순 한 신문이 '정부가 차명계좌의 전면 금지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하자 금융위원회가 '보도해명 자료'라는 것을 통해 '정부'는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진 차명계좌 전면 금지 방안을 놓고 박근혜정부가 출범 뒤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더니 마침내 그 즈음 안 하는 쪽으로 입장 정리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대로 가면 명의자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차명계좌를 전면 금지하는 금융실명제 보강을 통해 한국경제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한 단계 더 높일 모처럼의 기회가 유실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아무리 단속의 칼날을 휘둘러도 지하경제 축소는 공염불일 게 뻔하다. 간헐적 단속으로 세금을 좀 더 많이 거두는 정도나 가능할 것이다. 시스템 재정비와 법규 강화만이 지하경제 축소ㆍ양성화를 구조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이다.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 홍재형 재무장관은 '뒤주론'을 제기했다. 뒤주에 든 쌀은 둥근 바가지로 퍼내는데, 그래야 뒤주의 구석진 곳에 쌀이 남아 있게 된다는 얘기였다. 본성상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돈이 숨을 곳은 어느 정도 남겨둬야 경제에 충격이 덜하다는 주장이었다. 뒤주론이 힘을 발휘해 차명계좌라는 구멍이 숭숭 뚫린 금융실명제가 도입됐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와 비교하면 한국경제는 많이 투명해지고 성숙해졌다. 차명계좌를 전면 불법화하는 2단계 금융실명제를 시도해도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정부 경제팀에 그럴 의지가 있느냐가 문제다.
이주명 논설위원 c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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