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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김소월의 '개여울'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4초

당신은 무슨 일로/그리 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파릇한 풀포기가/돋아나오고/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시던/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날마다 개여울에/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이 시의 문제는 '가도'에 있다. '가기는 가도'를 줄인 이 짧은 표현은, 그가 간다는 팩트에 대해 애써 무심하려는 개여울 여인의 심경을 교묘히 노출시킨다. 그가 간다는 사실은 입 안에 담기조차 끔찍한 일이기에, 얼른 내뱉어 버리고는, '아주 가지는 않겠노라'는 연인의 다짐을 거기에다 힘 주어 갖다 붙인다. 개여울이란 하염없이 물들이 흘러가버리는 바로 그 자리다. 안 올 거라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지, 아주 가지는 않겠노라는 그런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 갔을꼬? 개여울 여인은 문득 깨닫는다. 아주 가지는 않겠노라? 아하. 그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니, 만나지 못하더라도 영영 잊지 말자는 얘기로구나. 개여울의 급류 속에서 여인이 발견한 건 그런 군색한 위로와 자기 설득이다. 아주 가지는 않겠노라는 그 말은 그러니까 아주 갈 수 밖에 없다는 뜻이었구나. 다만 함께 흘러가지 않은 여기 이 마음 만으로 내내 그리워하며 살자는 뜻이었구나. 오리라던 희망을 하향조정하여 그걸 원망으로 바꾸지 않고 고독 속에서 스스로 따뜻해지는 반듯한 사랑을 소월은 저 평이한 호흡의 시에서 살그머니 건져 올렸다. 흘러갔으나 흘러가지 않은 옛 사랑.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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